[아침을 열며]홍사종/여성이 '소비의 주체'라지만…

  • 입력 1999년 8월 15일 19시 43분


전화기 한 대 사기 위해 전자제품 대리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있을 때 눈에 띄는 제품이 있어 “이것 어때?”하고 아내를 향해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눈길 한 번 마주쳐주지 않은 채 자신만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골라 계산대로 갔다.

“당신 계산해요.” 아내 옆에는 엄마의 선택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아이들만이 물끄러미 아빠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성 소비선택권 축소

돈을 내면 될 일이었다. 가장인 나의 역할은 오로지 돈을 냄으로써 끝나는 것이었다. 순간 번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아, 이제 모든 소비의 주권이 여자들에게로 넘어갔구나.

불과 10년전만 해도 생산의 주권을 쥔 남정네들이 소비선택에 참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높아져가는 요즈음에 와서 소비선택에 관한 한 남성들의 입지가 볼품없이 줄어든 것이다.

시장의 속성이 이같은 현상을 읽지 않고, 반영 안할 리 없다.

이미 발빠른 기업들은 소비 주체인 여성을 공략하느라 분주하다. 가전제품 시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구 자동차, 심지어 남편의 넥타이까지도 주부이신 아내들이 선택하고 구매한다.

문화시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TV채널 선택권은 물론이고 연극 영화 콘서트 등의 시장도 70% 이상이 여성구매자들 차지다. 따라서 여성들의 소비심리나 기호를 모르고서는 시장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세상이 됐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사활이 여성들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문화를 팔아야 하는 직업의 나 역시 한동안 기업체 강연에서 ‘여자가 곧 시장’인 시대를 역설하고 다녔는데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수렵어로(狩獵漁撈)시대 모계사회로부터 권력을 찬탈해간 부권사회는 농경과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힘의 논리로 여자를 억압하고 생산과 소비의 모든 주권을 독점했다. 그러나 창의와 감성이 중시되는 정보화사회의 도래는 여성을 남성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여성도 세계의 주체로서 남성과 권력을 분점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생산의 영역은 여전히 남성의 독차지였다. 따라서 여성은 우선 쉬운 대로 소비의 영역을 획득해 냈다. 이제 여자를 모르면 물건도 팔 수 없는 시대다. 여성이 곧 시장이다.’

이런 논리에다가 가전제품의 TV광고 비판까지 곁들인다.

‘여성이 소비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미모의 여자 탤런트를 모델로 내세운 전자제품 광고는 실패를 예견할 수밖에 없다. 유명 탤런트는 주부인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에 반하여 화려하고, 남편을 향해서는 무언가 편치않은 잠재적 라이벌일 뿐이다. 그 제품은 남성들의 눈요깃감을 제공해 주는 정도 아니면 유명인이 선전하는 물건으로밖에 비치지 못할 것이다.

★마케팅전략 수정돼야

그러나 이상적 남편의 모습을 닮은 남자모델이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아내에 대한 서비스를 담아 선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남편이 빨래해주고 요리해주는 장면은 오늘날 주부의 생활 속에서는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 대한 꿈을 담아서 제품을 선전할 때 여성들은 꿈이 담겨진 물건을 산다. 미국 공황기에 오직 꿈을 판 영화산업이 성공했던 것처럼. 미래에는 여성을 읽어야 기업도 살 수 있다.’

하지만 미래 시장까지도 여성들이 지배한다는 나의 주장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던 판단이다. 생산과 소비의 주권을 남성과 여성이 싸우듯 나눠가진 지금의 사회는 무언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얼마전 세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장관 부인들의 과소비 사건의 본질도 생산을 독점한 남성 권력이 능력있고 똑똑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나누어주지 않은 결과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이제 정보화로 촉발된 미래사회는 남성이 여성과 공평하게 일자리를 나누는 시대다. 따라서 남성들이 먼저 나누면 여성 또한 소비의 주권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때가 되면 내가 고른 전화기를 보며 찬탄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환성도 되살아날 것이다. 앞으로 여자 믿다가 기업 망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란다.

홍사종(정동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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