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룡의 환상세계]순정만화-소설의 ‘인생 시뮬레이션’

  • 입력 1999년 10월 11일 19시 32분


최근 번역 출간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하치의 마지막 연인’을 읽었다. 앞서 출간된 ‘키친’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소재 역시 도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다.

이별을 앞에 둔 주인공 소녀 마오와 그의 애인 하치.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이별을 두려워하거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끌어안는 방법을 모색할 뿐이다.

역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순정만화적이다. 이 말은 요시모토 바나나를 폄하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70년대 후반 일본의 순정만화는 여러 가지 자기 혁신을 단행했다. 혁신 중 하나가 타인과의 관계를 시뮬레이션하는 기능의 추가였다.

최근 한국에서도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 ‘해피 매니아’(안노 모요코)도 같은 종류의 만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후반 여성. 간절히 연인을 만들고자 하지만 남자 운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조급증이 항상 일을 망쳐놓는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른 남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언제나 결과는 실패다.

장대한 스토리도 따뜻한 감동도 없고,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도 일어나지 않는 연애 실패담의 연속에 사람들은 왜 빠져드는 것일까? 바로 자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간접경험을 해두면 실제로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다. 순정만화의 ‘인생 시뮬레이션’ 기능을 통해 ‘실패에 대한 면역’을 제공받는 것이다.

일본의 순정만화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것을 보면 독자들이 더 이상 작가에게 고담준론이나 숭고한 메시지를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이미 수많은 담론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상이나 메시지도 어디선가 한 번 들었던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작가들이 해야할 일은 현실을 꼼꼼히 관찰하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김지룡〈신세대문화 평론가〉DRAGONKJ@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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