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하게 마을 지켜와▼
가을 들판에 나가 보라. 그리고 들판에 자라는 모든 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모든 풀들이 다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들국화로만 가을을 노래한다. 그러나 산자락이나 논두렁이나 깊은 산골짜기에 하얗게 피어나는 억새도 저문 산아래에선 꽃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오요요 강아지풀도 그것이 바로 꽃이다. 까만 머리칼 같은 털로 아침 이슬을 잔뜩 달고 햇살을 비껴 받는 수크렁 풀은 그 얼마나 꽃다운가. 자세히 바라보면 그 풀들은 또 얼마나 꽃다운가. 깊은 생각으로 고개 숙여 익어가는 벼도 꽃을 피운다. 오만가지 생각과 고민으로 모든 풀들은 이 가을에 밖으로 꽃 피우고, 안으로 익어간다.
꽃만 꽃인가. ‘가을이 되어/감은/뜨거운 햇살 속에서/깨어났다(우리반 귀봉이 동시).’ 이 동시처럼, 아침 안개 속에 드러나는 주렁주렁 붉은 감들을 보라. 논두렁에 쓰러진 마른 풀잎에 맺힌 이슬에서 빛나는 햇살들, 물들어 가는 저 만산의 홍엽도 다 꽃이다. 반짝이며 흐르는 아침 강물, 텅텅 비어 가는 들 끝에 파랗게 자라고 있는 배추 밭머리를 지나가는 농부들의 저 고단한 등을 보라. 아침들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느티나무, 그 밑에 하얗고 환하게 부유하는 안개 알갱이에 닿는 저 무욕의 빛을 보라. 느티나무는 저 들판의 중심이며, 저 들을 가꾸어 주는 꽃이다. 모든 사물의 중심이 꽃이 아니던가.
저 느티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에 모든 일들을 추렸다. 들과 마을을, 모든 정신을 모아주던 느티나무 아래에서의 모든 일과 놀이는 마을의 축제였다. 오늘날 자고 일어나면 벌어지는 저 수많은 ‘너그들만의 축제’와는 다른 신명나는 일과 놀이의 축제가 저 느티나무 아래에서 피어나는 자운영꽃처럼 화려하게 펼쳐졌었다. 느티나무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가는 아이, 쟁기를 지고 지나는 농부, 하얀 수건을 쓰고 머리에 붉은 감을 이고 가는 어머니, 아기를 업고 지나는 누이들, 비바람이 불면 아, 온몸으로 들을 지키는 자세로 의연하게 서 있던 느티나무, 눈이 내리면 눈을 하얗게 다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다 맞는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가 지금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고달픈 현실 위안삼아▼
느티나무 아래로 찾아든 햇살로 보는 저쪽 가을 강물, 그 강가에 하얗게 나부끼는 억새, 아직 덜 벤 논의 저 샛노란 벼들, 아, 저 나무에 잎이 환하게 피어날 때 나는 늘 피어나는 새 이파리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저렇게 황금색으로 물들어 저 들에 드러나는 저 느티나무 잎이 꽃임을 오늘 새로 알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들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보면 나는 한평생을 한 들에서 농사 지으며 살아 온 나이 많이 드신 농부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세상이 든든해짐을 느낀다.
저 들에서 만고풍상을 다 겪고 이겨냈을 저 든든한 나무에 나는 다가가 온몸을 기대고 싶고 올려다보고 싶고 내 인생과 세상의 희망을 걸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을 둘러보는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지금 어디에 등을 따뜻하게 기대고 사는가. 우리들의 이 고달픈 삶, 불안한 내일을 어디에 기대본단 말인가. 우리에게 그럴 나무는 있는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어떤 무엇이 있는가. 우리들은 이 어지러운 현실을 어느 등에 기대고 서서 내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인가. 작년에 피어났던 청초한 들국화가 올해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은 아름답고 고운 일이지만, 지난 시절 신물이 나게 보아왔던 일들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버젓이 다른 탈을 쓰고 벌어지는 것은 인간에대한모욕이다.
사람들은 산과 들에 피어나는 꽃만 꽃인 줄 알았지 사람들도 다 꽃을 피우고 싶고 꽃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는 것 같다. 이 가을 아침 안개속에서 눈이 부시게 드러나는 저 들판의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면 나도 꽃이다. 사람들아, 곧 잎이 다 진다. 잎 지기 전에, 잎이 다 지기 전에….
김용택<시인·임실 마암분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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