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장준하와 박정희

  • 입력 1999년 11월 1일 19시 07분


정부는 11월 1일 잡지의 날을 맞아 ‘월간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고 장준하(張俊河)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행정자치부가 “상훈기간이 20년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은관문화훈장으로 격을 낮추었다가 유족들의 거부로 훈장 추서가 무산된 지 꼭 1년만이다. 그런데 선생을 추앙하는 사람들조차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정부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벌였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무일푼으로 창간한 ‘사상계’를 아시아 4대 잡지 가운데 하나로 키웠고, 그 업적으로 62년 한국 최초로 언론부문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그런 선생이 이제서야 국가의 훈장을 추서받은 것은 불행한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며, 그 비극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장준하와 ‘사상계’를 모를 것이다. 명실상부한 지식인 정론지로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사회정의 등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었던 ‘사상계’는 박정희 정권과의 끝없는 충돌 끝에 70년 폐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사상계’가 그랬던 것처럼 장준하의 죽음도 평범한 출판인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신체제 반대투쟁을 주도했던 그는 75년 8월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등반길에서 죽음을 맞았다. 외상도 골절도 없고 안경조차 깨지지 않은 의문의 추락사였다. 10월 유신 이후 15년간 계속된 군사독재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가 그의 이름을 다시는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1915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돼 만주에 파병됐다. 6개월만에 일본 병영을 탈출한 그는 중국 대륙을 반 바퀴 도는 6천리 대장정 끝에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갔으며, 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았다. 30대 청년 지식인으로서 신생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어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통일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장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 무려 열 번이 넘게 투옥당하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은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집권당 국민회의는 최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률이 제정되면 장준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벗겨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과 죽음이 드러내는 현대사의 비극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광복군의 전사였던 장준하를 박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유신체제, 그 체제를 이끈 인물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였다. 심복의 총에 최후를 맞았던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는 일에 ‘국민의 정부’는 1백억원 가까운 돈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금관문화훈장 추서는 잘한 일이다. 그러나 생전에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지만 박정희만은 예외”라고 했던 선생이 국민의 세금으로 짓는 독재자의 기념관을 보면서도 그 훈장을 기꺼워할 리는 없을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돼 군사독재 시절의 숱한 의문사 사건을 조사할 경우 어떤 추악한 권력의 야만행위가 햇빛 아래 드러날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덮어둔 위에 박정희 기념관을 지을 수는 없다. 양민학살의 진상을 묻어둔 채 노근리 쌍굴다리에 미군참전 기념관을 짓는다고 가정해 보라. 나는 그런 일에 단 한 푼의 세금도 보태고 싶지 않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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