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형국/도시아이의 울음

  • 입력 1999년 11월 14일 18시 50분


고밀도시에 살다보니 소음에 대한 나의 참을성도 어지간히 높아져 있다. 지하철 안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신호음 그리고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에다 퍼붓는 고함소리를 잘도 참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라고 광고하는 휴대전화 회사에 대한 원망이 고작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주부가 불편한 도시는 나쁜 도시’라 했는데, 공공장소인데도 아이가 울음을 그칠 수 없는 사정이라면 그건 사회가 병들고 있다는 조짐일 것이다. 사회는 가정이 모인 것이고 가정의 건강은, 서양화가 장욱진이 지붕 아래에 즐겁게 노는 아이를 그려놓은 ‘집 당(堂)’자 그림글자처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음에 달렸기 때문이다.

며칠전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아이 울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울음이 더욱 높아지자 곤두선 신경은 온통 그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네댓살 먹은 아이인데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길 없지만 엄마로 보이는 30대초반 여성이 손바닥을 편 채 아이 얼굴 정면을 계속 때렸고, 그래도 그치지 않자 손가락에 아이의 코를 끼어 비틀곤 하는 것이다.

‘남 사정 나 몰라라’가 서울사람 체질이고 나 또한 그러하지만, 그 자리에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불쑥 “저런 사람도 에미인가”하고 소리치고는 내릴 역이 아닌데도 서둘러 내리고 말았다.

내리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이를 때리기에 앞서 너 자신을 먼저 때려라”고 한마디 해줄 걸. 어느 현모(賢母) 이야기가 왜 그 자리에서 기억나지 않았나 안타깝기만 했다. 어린 형제들이 싸우자 회초리를 찾아 들고는 오히려 자신의 무릎을 치자, 형제들이 놀라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을 보고는 “너희들이 싸우면 엄마 마음이 바로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라 타일렀다던 일화가 왜 생각나지 않았던가 하고.

날로 늘고 있는 청소년 비행을 보면 이게 모두 산업도시시대를 사는 우리가 치르는 비용임이 분명하다. 농경시대와는 달리, 잠자리와 일자리가 나눠지자 남자 가장들은 집 밖의 일에 매달린채 모든 가사를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다. 어머니쪽에선 자애를 베풀고 아버지쪽에선 기율을 본보여야 함이 가정교육인데도, 아버지 쪽의 기율은 보일 틈 없이 어머니의 자애만 넘쳐나 아이들이 과보호된 미숙아가 되고 있다. 이른바 일류대학생은 하는 짓도 일류일 것 같지만, 대학행정실에다 학기 중간시험 날짜 등을 챙기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음도 우리 서울대 사정이 되고 말았다.

남성들의 일방적인 욕심이겠는데 아버지가 가사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는 시대엔 어머니가 기율도 아울러 가르침이 대안(代案)일 법하다. 하지만 배운 바 없는 기율을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이 시대 어머니도 지난날의 가부장시절을 직 간접으로 체험하긴 했지만 정작 그런 기율을 배울 기회는 누리지 못했다. 그 시절 기율의 가르침은 아버지에게서 장차의 출가외인(出嫁外人) 딸은 빼고 아들로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에서 만났던 광경처럼, 아이 버릇 가르침이 기껏 우는 아이 손찌검인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 버릇이 나빠져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는데, 이는 가정교육의 함량미달을 말해주는 다른 증거일 것이다.

방도가 없을까. 시대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이행하면 일말의 희망이 보일 법도 하다. 직장근무 대신 재택(在宅)근무형 밥벌이 기회가 늘어나면 아버지의 가정교육 참여가 많아질 가능성이 있겠지 싶어서다. 그러기에 앞서 당장 우리 사회가 힘쓸 일도 있다. 아이에겐 사랑이 자양분인데, 아이는 해당 가정에선 금지옥엽이지만 사회적 대접은 말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어린 아이를 업은 어머니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선진국형 미덕은 우린 아직 못 배우고 있다. 물론 그런 대접을 받자면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무단히 뛰어 다니는 행실부터 미리 가정에서 바로 잡아 놓아야 할 것이다.

김형국(서울대 교수·지역개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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