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안정옥/아줌마여 깨어 있으세요

  • 입력 2000년 1월 2일 23시 21분


지난해 늦가을이다. 은행나무 즐비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주저앉은 이유에 대해 가끔 아주 가끔 생각했다. 양손 가득 슈퍼 봉지를 들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를 걷는데 초입부터 저쪽 끝까지 스산한 바람들이 나무들을 흔들어 놓았다. 은행나무 잎들이 눈처럼 내렸다. 곧 황금을 뒤집어 썼다. 나는 황금을 깔고 앉아 맞은편 길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고요하다. 차들은 날렵하게 달린다. 차들을 바라보며 삶에서의 일탈을 나는 꿈꾼다. 지금 한계령을 넘으면 안개가 먼저 나서리라. 그런 다음 더 깊은 안개를 더듬으면 그 사이 사이로 나무들이 절벽으로 빠지고 다시 솟구쳐 오른다. 안개와 나무들 발 아래가 불안하다. 사방이 어둡다. 시계를 본다. 시간이 저 혼자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늘 사로잡힌 일상으로 나는 뛴다. 그 즈음 식구들이 다 자는 한밤중 소파에 자주 웅크리고 있다. 그러면 가구가, 액자 속의 여자가, 불 꺼진 전구가 측은한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하여튼 좀 이상한 나이가 된 것 같았다.

어릴 때 엄마는 마술사였다. 없는 살림인데도 마술사처럼 오빠나 남동생 국그릇에는 고기가 한없이 들어가고 그것이 우리들 앞에서는 멈췄다. 새 옷, 새 운동화 그것들은 빛났고 우리들은 참는 것을 배운 것 같았다. 내게는 그 마술이라는 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살았나, 길들여져 온 것들의 답습은 아니었을까.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랐고 어느날부터 아이들과 멀어지는 걸 느낀다. 내 생각보다 그런 상황은 더 빨리 찾아왔다.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진 않을거야.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아이의 눈에서 듣는다. 당황이 된다. 난 그 말을 몇 살쯤에 했던가. 삶은 얻는 것과 잃은 것을 동시에 가져야 됨을 이제 알 것 같다. 모든 걸 소유하는 생은 아무도 없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는 내어 놓아야 함을 이제야 알 것 같은데 시간은 휭하니 저 혼자 달아난다. 그제야 돌아보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흘러 가버린 자아를 어디로 가서 찾을 것인가. 두렵다. 그러나 여권 운운은 믿지 마라. 우리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말에 불과하다. 눈치챌 수 없는 교묘한 차별 앞에서 갑절로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을 뿐이다. 죽어간 여자들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 주저없이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아줌마들 천지에 자기는 없고 그들만 분분하다. 엄마들이 잃은 것, 우리들은 그것을 파먹고 할머니들은 더 위에 잃은 것을 파먹고 그 덕에 우리들은 한결 따뜻해졌다. 우리들이 잃은 것 그것을 딛고 또 다른 젊은 여자들이 악순환을 거쳐 훨씬 나은 세상으로 진입할 것이다.

세상은 시간마다 변화하고 있다. 이제 변화는 삶의 한 부분이 됐다. 직장이라는 개념도 무너지고 재벌도 눈 깜짝할 사이 해체된다. 이 나라는 얼마나 대단한가. 너무 많은 변화를 제공해 자주 혼절할 것 같다. 의식이 언제나 깨어 있어야 된다. 마치 운동 선수처럼 공 받을 포즈를 취하며 자, 오너라 단련이 된 아줌마들은 중성이 돼갔다. 그들이 부드러움을 가져갔다. 받아들여야 할 것들은 눈 뜨면 생겨났다. 갈 곳은 너무 많아졌다. 살림만 잘하면 되던 시절은 영원히 가버렸다. 지식과 정보의 시대까지 맞이했는데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되는가. 안주가 때때로 그립다.

당신은 나를 아줌마라고 불러준다. 당신의 가장 가까운 이를 나도 아줌마라고 부른다. 거기에 가능성이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를 마음이 돼 있는 상처처럼 헌신만 가지고 있는 당신, 가끔은 독한 것 질긴 것 버리고 여자가 되고 싶다. 서울 근교의 식당, 맛있다고 이름이 난 집들의 이방 저 방에는 허리띠 풀어 놓고 부지런히 먹고 있는 아줌마들이 있다. 나도 가끔 낀다. 어쩐 이는 눈살을 찌푸리지만 마지막 한 숟가락은 남겨놓고 잠깐만 생각하자. 밥하고 빨래하고 그런 일은 이제 남자들도 다 한다. 그럼 우리들은 오늘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열쇠 몇 개씩 가지고 있는 허리통 튼튼한 아줌마들, 시간을 더욱 쪼개 노자 맹자나 공부해볼까. 그저 받기만 좋아하고 미모만 앞세우면 몇 십년도 안돼 A사, K사 제품의 여자들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안정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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