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법정/지식이 지혜로 바뀌어야

  • 입력 2000년 1월 5일 09시 03분


▼'새천년'은 유치한 호들갑▼

달력이 바뀌었다.

새해라고 한다.

새해라 하니, 그 새해는 어디서 오는가.

시작도 끝도 없는 세월에 새 것과 헌 것이 있는가.

해가 바뀌면 나이 어린 사람들은 한 살이 보태지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한 살이 줄어든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보태졌는가, 줄어들었는가.

그렇지만 해가 바뀌어도 보태지거나 줄어드는 일에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누구인가.

순간순간 자신이 놓여 있는 ‘그 자리’를, 바로 지금 그 자리를 안으로 살펴보면서 늘 깨어 있는 사람은 세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는 지금 그곳에 그렇게 있다.

새 천년이 왔다고 여기저기서 귀가 따갑고 눈이 어지럽도록 떠들어대는 소란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인간들은 철이 들려면 멀었구나 싶었다. 이런 호들갑은 숫자에 매달려 죽고 사는 서양의 물질문명에서 빚어진 유치한 발상이며 치졸한 놀이다. 그런데 동양의 후예들마저 그런 장단에 놀아나고 있으니 한심스럽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인도의 베다시대와 중국의 삼황오제 때를 가릴 것 없이 그런 숫자의 놀이에 얽혀들지 않았다.

올해가 단기로는 4333년이지만 우리 한민족 중에서 어느 한 사람 새 천년을 노래한 사람이 있던가. 불기 2544년이 된 금년에 이르도록 새 천년을 읊은 불교신자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우리가 지금 연도 표시로 서기를 쓰는 것은, 서양의 영향을 받아 편의상 공통적인 ‘기호’로써 쓰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예수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동양에서는 뛰어난 지혜의 문명을 이루면서 조용하고 점잖게 살아왔다. 그와 같은 미덕이 우리시대 바로 이전까지는 연면히 이어져 왔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생명의 존엄성과 그 질서를 무너뜨린 파괴적인 물질만능의 재난으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 전체가 그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새 천년을 노래할 만큼 우리 현실이 만족할 만한가. 이래서 인간들이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같은 인간의 처지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보화사회라고 해서 신지식을 찾아 다들 정신 없이 뛰고 있다. 쉬운 말로 하자면 돈벌이가 될 만한 새로운 소재를 찾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것이다.

치열하고 비정한 경쟁사회에서는 새 것을 찾지 않으면 대열에서 처져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자.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 한정된 자원을 가진 이 지구 안에서 새 것만을 끝없이 찾아 헤맬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이 새 것만인가. 그 새 것 속에 과연 행복이 깃들여 있는가.

▼마음속 '지혜의 샘' 찾아야▼

지식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다. 굳이 좁은 문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컴퓨터 키만 두들기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료를 통해서 지식은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렇지 않다. 생명력을 지닌 지혜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몸소 체험하면서 안으로 가꾸어진 그 열매가 지혜다. 지식은 메마른 분석이고 분별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영혼이 없다. 그러나 지혜는 조화와 균형을 갖춘 영혼의 빛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때, 영혼이 없는 건조한 지식만으로는 사태를 돌이키기 어렵다. 영혼의 빛인 그 지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그 지혜의 샘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다. 밖에서 찾지 말라. 자연의 질서 또한 그 지혜의 흐름이다.

묵묵히 그 질서를 지켜보면서 몸에 익히라. 거기 우리가 헤쳐가야 할 삶의 길이 있다.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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