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든, 자발적이든 새로운 밀레니엄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는 한 우리는 서구적인 시간관, 문화권의 전통에 이미 깊숙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서력을 만든 문화권의 전통 가운데 내가 특히 눈여겨보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갈 데까지 간다’는 점이다.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진 단선적인 시간관 속에서는 시동이 걸리면 어차피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의 유한성, ‘나’의 한계, 실존의 부조리를 뼛속까지 인식하고 실천하는, 혹은 저지르는 ‘갈 데까지 가보자’가 때로는 부럽고, 때로는 무섭다. 한 사람이 갈 데까지 가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잇고, 한 사람이 갈 데까지 가면 다른 사람은 또 새로운 방향으로 갈 데까지 간다. 콜럼버스가 동인도를 발견하고 니체가 인간 속의 심연을 응시하게 된 데는 이 ‘갈 데까지 가보자’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돈키호테가, 카사노바가 갈 데까지 갔다.
60갑자, 48절기를 쓰는 동양적인 시간관 속에서는 갈 데까지 간다는 건 의미가 별로 없다. 결국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갈 데까지 가겠다고 어렵게 마음먹고 나서면 식구가, 벗이, 온 마을이, 심지어 조상까지 벌떡 일어나 말린다. 그래봤자 결국 마찬가지라고.
지금 우리 역시 어느 면에서는 갈 데까지 갔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 식구를 아끼고 감싸는 것을 넘어 불법을 불사하는 사람들로 법정이 붐빈다. 성공한 스포츠 스타의 뒤에는 반드시 엄혹한 아버지가 있고 예술계며 연예계 스타의 뒤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자기 희생이 있다. 제 핏줄과 태어난 곳과 배운 곳에 연연하는 것은 또한 단연 금메달감이 아닌가. 올림픽에 그런 종목이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그러나 갈 데까지 가는 것은 결국 혼자이고 혼자여야 한다. 중국의 선승 임제(臨濟義玄· ?∼867)가 말했듯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해 어떠한 경계에서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여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갈 데까지 가는 인간은 독한 인간이다. 식구를 베고 전장으로 떠난 계백, 왕좌를 버린 부처, 사랑하는 사람의 집으로 자신을 데려다준 말의 머리를 베어버린 김유신은 독한 영웅들이다. 역사 속의 영웅을 본받아 우리 속의 나, 내 속의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계획할 수도 없는 길을 등불도 없이 더듬거리며 삐걱거리며 나아간다. 믿을 건 오직 독한 마음, 현존하는 육체와 오감뿐. 그러나 갈 데까지 가고야 마는 불굴의 정신은 때로 감각과 논리를 뛰어넘는 영감을 계발하게 한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초인을 낳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의 현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내가 크려면 나보다 조금 더 큰 놈의 무엇을 물고 늘어지는’ 진창 속의 개싸움 형상이다. 남의 호박에 말뚝을 박는 데는 고수이지만 제 집 변소의 전구 하나도 갈아 끼우지 못하는 이상한 명망가들이 소매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들려오느니 올해를 ‘새로운 예술의 해’라고 한다. 문화가 새로우려면 특히 직립 독보, 유아독존하는 독한 인간이 많아야 한다.
홀로 광야에 나아가 쓰러진다 하더라도 뒤에 꽃피울 나무를 위한 거름이 되리라. 문화에는 아직 전인미답의 신대륙이, 동굴 속의 용이 지키는 황금이 수두룩하다. 갈 데까지 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독하지 않으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성석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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