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고인 물'이 밀리면…

  • 입력 2000년 1월 21일 01시 03분


시민단체들의 낙천 낙선운동이 엄청난 탄력을 받고 있다. 유권자들의 선거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그럼 4·13총선은 정말 깨끗하게 치러질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역대 어느 선거보다 혼탁해질 가능성이 높다. 역설적이게도 시민단체들이 감시의 눈을 부릅떠 선거 개입이 합법화되려는 마당이어서 더욱 그렇다. 고인 물에 새 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큰 소용돌이가 일 듯 정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전유물이었던 선거판에 밀려오는 시민의 힘에 맞서 사력을 다할 것임이 분명해서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렸다. 붙잡힌 소매치기범을 공개 처형해 겁을 주자는 얘기가 나왔다. 수천명의 사람이 광장에 운집해 그 처형장면을 지켜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형장 주변에서 소매치기당한 사람이 부지기수로 나왔다. 앞으로 소매치기는 힘들 거라고 판단한 치기배들이 몰려와 ‘마지막 기회’에 결사적으로 매달린 결과였다.

▼구정치 기득권 지키기 여전▼

이번 선거를 그렇게 우악스럽게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물결, 시민의 힘이 선거의 최대변수로 대두된 지금 정치 기득권자들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시민단체들이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인다지만 기득권세력 역시 급부상하는 신세력에 저항할 마지막 기회라는 판단에서 사력을 다하지 않겠는가.

그런 기미는 지난 주말에 이미 나타났다.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등 시민단체의 저항이 불꽃처럼 번지는데도 정치권은 옛 틀보다 더욱 후퇴한 선거법을 버젓이 내놓았다. 밀실에서 야합한 그 법을 당일 ‘즉결처리’하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내부 일부의 밥그릇을 못챙긴 탓에 분란이 일어나 실패했다. 결국 여론의 힘에 밀려 재협상에 들어갔지만 아직도 정치를 시민에게 돌려주기보다 어떻게든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이 여전하다. 국회의원 정수의 축소는 안된다거나 선거구 획정에 대한조정 당론을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모양은 ‘좋았던 시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이나 다름없다.

공천 문제도 그렇다. 시민단체의 강경자세에 놀란 정당대표들은 부랴부랴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낙천대상자 명단도 참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결정된 물갈이 대상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시민단체들의 낙천대상자 공개는 엄밀히 말해 보스 1인에게 귀속된 공천권에 대한 항거이며 궁극적으로는 시민의 목소리가 실린 공천, 밑으로부터 올라가는 공천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스정치를 끝내자는 얘기란 것이다. 이런. 시민단체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 보스의 힘은 급속히 시민에게 쏠려간다. 듣지 않고 낙천대상자를 공천하면 시민단체와의 일전을 불사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지면 역시 보스의 공천권은 심하게 훼손되므로 온 힘을 다해 후보를 밀 것이고 보스의 부름을 받은 후보도 보스든 후보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모든 수를 다 쓸 것이다. 이런 선거 모습이 깨끗할 수 있을까.

시민의 힘이 정치를 바꾼 것을 우리는 60년 4·19와 87년 6월항쟁에서 경험했다. 그러나 당시 시민의 힘은 시민보다는 학생운동의 힘이 주였다. 결사체로서의 힘도 아니었다. 오늘 시민의 힘은 결사체의 힘으로서 등장했다. 민주사회에서 정치와 시민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은 정당이 해야 하는데도 정당들이 이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처음인 시민들의 집단적 직접적 선거개입을 보고 기성정치권이 놀라고 있지만 자업자득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저항은 다시 기득권을 이용해 벌어질 게 틀림없다. 그 기득권은 돈이며 조직이다. 기성 정치판을 바꾸려는 물결에 돈과 조직을 총동원해 맞싸울 것이다.

▼이제 선거마당 감시 나서야▼

그렇다면 시민의 힘은 이제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낙천 낙선운동의 성과에 만족해 그 틀에 머물다보면 돈과 조직이라는 공룡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돈 안 쓰고 연줄에 휩쓸리지 않는 선거마당을 만들고 감시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유권자운동이 공명선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몇세기 전 한 계몽사상가는 “공동사회 유지를 위한 국가조직에서 입법부는 최고 권력기관”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그것이정치가 시민이 의탁한 신뢰를 배신하는 움직임을 보일 경우 이를 제거하거나 변경하는 최고권력은 여전히 시민의 수중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 시민단체는 그 최고권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시민의 최고권력 행사는 목적달성과 함께 끝나야만 대의민주정치 의회정치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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