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러 단체에서 대표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분이 두 영훈(英勳)선생님이라고 한다. 서영훈(徐英勳·77)씨와 강영훈(姜英勳·78)씨가 그 주인공이다. 고향이 모두 평안도인 두 분은 나이도 비슷한 원로이지만 깨끗하고 꼿꼿한 이미지 때문에 단체마다 서로 모시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두 분이 현재 ‘대표’로 되어 있는 각종 단체나 모임은 80여개나 된다. 서영훈씨의 경우 제2건국추진위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각종 단체나 모임에 회장 위원장 단장 의장 이사장 총재 공동대표 고문 등의 이름으로 간여하고 있는데 그 수가 33개나 된다. 국무총리까지 지낸 강영훈씨는 이보다 훨씬 많아 50개 가까이 된다.
▼정당에도 ‘시장’원리가…▼
두 분 다 인격적으로 고매하고 본인들 스스로도 ‘이름’ 관리를 잘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엊그제 창당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당대표 후보로 여러 사람을 놓고 고심한 끝에 서영훈씨의 깨끗한 이미지와 이름을 보고 ‘얼굴’로 골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씨가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의 대표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이겠으나 정당, 그것도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는 얼마나 제 역할을 해낼는지 궁금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은 왜 정치를 마다하는 분을 ‘억지춘향격’으로 정치판에 끌어들이느냐는 것이다. 그분의 정치력이나 정치적 이념을 높이 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국민회의가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 민주당이 됐다지만 오너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고 실제로 힘을 쓸 사람들은 이른바 동교동계를 비롯한 가신(家臣)출신의 실세들 아닌가. 그들은 오랫동안 정치를 같이 해왔기 때문에 서로 호흡이 잘 맞을 것이다. 이렇게 호흡이 맞고 이념을 같이하는 동지 중에서 대표가 나오는 것이 일의 능률을 위해서도, 당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는 데도 필요한 게 아닌가. 그리고 그러는 것이 솔직한 정치 아니겠는가. 과거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정통성 없는 정권에서는 자신들의 반민주적 폭력성을 가리기 위해, 열등감을 덮기 위해 이미지가 좋은 원로 학자나 명망가를 높은 자리에 모신 예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는 50년 만에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권력의 정통성이나 정당성에서 조금도 흠이 없는 정권이 아닌가. 그런데도 굳이 외부에서 대표를 모셔와야 하는 이유는 뭘까.
얼마전 민주당에 입당한 어떤 경제칼럼니스트는 ‘정치 입문’의 변에서 자신의 가장 큰 꿈은 우리 정치에도 다른 분야처럼 ‘시장’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장이 작동한다는 뜻은 경쟁이 있다는 얘기다. 정치에, 정당에도 시장이 작동하려면 건전한 경쟁이 있어야 한다. 실력과 능력으로 경쟁하여 충분히 검증된 사람이 당 대표도 되고 당 총재도 되는, 그리고 ‘대권’(大權)후보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정당이다. 시장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능력 있는 사람은 일어서지만 무능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퇴출되거나 응분의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누가 공천해줬나▼
그러나 1인 지배의 독점재벌에서는 오너가 경영을 잘못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보스 1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정당은 사당(私黨)일 뿐이다. 이른바 3김식 정치의 폐단도 바로 시장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낙천 낙선운동도 그 본질은 3김식 정치를 청산하자는 것이라고 본다. 투명한 공천, 공정한 경쟁을 통해 경쟁력 있는 인물을 가려내자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낙선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원들, 쿠데타 주동자를 비롯해 뇌물수수 등 부패와 비리 관련자, 추태를 부리고 저질 발언을 해온 수준 이하의 의원들은 누가 공천했으며 누가 끌어들였고 누가 좋은 자리에 앉혔나. 밀실 공천, 돈 보따리 공천, 가신 중심의 패거리 공천, 지연 등에 좌우된 정실 공천은 누가 했는가. 정당 지도자들은 낙선운동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남 얘기하듯 할 게 아니다. 이 운동이 옳으니 그르니, 법으로 규제해서 되느니 안되느니 하는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깊이 반성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선 김대통령을 비롯한 3김씨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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