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출판기획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에 적지 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기획이란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고 거기에서 장사가 될 만한 것이 뭔지 아이디어를 짜내는 직업이었다. 나에게는 세상의 속도에 처지지 않도록 긴장해야 하는 그 일이 벅차게 느껴졌다. 소설가가 되면 세상이라는 거센 물살을 따라 정신 없이 휩쓸려가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타고난 내 성격 그대로 좀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살아도 되는 직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종의 전업에 성공했다. 당연히 여유로운 삶이 시작될 걸로 믿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소설가, 긴 여행길에서 들판 위에 선 채 오래도록 황혼을 바라보는 소설가, 낙엽이 쌓인 길을 산책하고 돌아와 창가의 책상에 앉아서 밤이 깊어진 줄도 모르고 원고를 메워 가는 소설가, 혼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소설가, 이따금 외출해 영화와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소재가 떠오른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보는 소설가. 그러나 나는 그런 소설가가 될 수 없었다. 왜? 그런 소설가는 20년 전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해가고 있다. 내가 2년을 살았던 아파트 상가에는 비디오 가게가 없어지고 소주방이 들어서더니 만화대여점으로 바뀌었고 한 달 전부터는 PC방이 되었다. 목욕탕 간판이 모두 무슨 무슨 사우나가 되는가 싶더니 얼마 전부터 찜질방, 불가마 체험실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몇 달 전 점찍어둔 가전제품을 벼르고 별러서 사러 가면 그 사이 더 비싼 신모델이 나와 있게 마련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인터넷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인터넷 혁명을 외치는가 하면 다른 방송에서는 ‘인터넷으로 방안에만 앉아서 모든 걸 다 해결하려고 하면 폐쇄적이 되니 맑은 공기를 마시고 직접체험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라’는 둥 벌써부터 새로운 건전함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언어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왕따 당하기 싫어서, 어른은 어른대로 쉰세대로 낙인찍히기 싫어서 새로운 유행어를 다투어 사용한다. 무엇을 따라가려고 하면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으니 불안하고 조급증이 생긴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전파시키는 한국어는 ‘빨리 빨리’라는 말이라고 한다. 빨리 결과를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요령이 늘고, 원리는 모르는 채 기능만 익히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바람에 과정의 재미, 무위의 소중함 같은 건 다 잊혀졌다.
오랜만에 미당의 시를 읽어본다. 그토록 그리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도 다른 것에 홀려 한눈을 파는 ‘해찰’이야말로 인생관의 스케일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때로는 눈앞에 당도한 것에서 시선을 거두고 아주 오래된 과거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오리진’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받은 충격이 기억난다. 지구가 탄생한 이후의 역사를 1000 페이지 분량의 책속에 담아본다고 하자. 한 페이지는 450만년에 해당된다. 그 책의 앞부분 4분의 1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데 할애되고, 4분의 3으로 접어들어서야 겨우 플랑크톤 같은 미생물이 등장한다. 공룡의 시대는 30페이지쯤. 그리고 인류의 조상이 발견된 것은 마지막 3페이지이다. 현생인류의 발생은 그 책의 마지막 단 한 줄. 그러니 석기시대부터 르네상스 산업혁명 같은 현대사의 사건들은 맨 마지막 줄의 한 단어쯤으로 요약해야 한다. 인터넷? 새천년? 그것은 단어는커녕 점도 되지 못한다.
때로 보이지 않는 광대 무변과 거대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한숨 돌리고 가는 거다. 소설가 노릇도 마찬가지다.
은희경<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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