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대서양주의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민주주의 경제대국들과의 협력을 중시한다. 대서양주의자들은 러시아가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고 서구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길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서구와의 협력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아시아-태평양국가들과의 제휴에 무게를 둔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친미 친서방 노선을 걸어온 결과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선진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예속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반박하면서 지난날 옛 소련에 속했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동아시아국가들과의 제휴를 강화함으로써 서방세계에 대한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틴의 이제까지의 발언은 그가 유라시아주의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미국의 세계주도에 대한 불만을 때때로 표면화시켰으며, 러시아가 유럽국가이면서 동시에 아시아국가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강화해 왔다. 여기에는 옛 소련이 해체된 뒤 미국이 단독적 패권국가로 세계정치를 좌우하는 반면 러시아는 비록 핵무기는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세계정치의 중심에서 소외되고 있는 데 대한 반발심리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한 반발심리는 푸틴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민 대다수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해 러시아 국민은 ‘강대국 향수병’을 앓고 있으며, 푸틴은 이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푸틴이 제시한 ‘새 국가안보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러시아가 핵무장력을 강화할 것과 재래식 무기를 증강할 것을 역설하면서 대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강력한 러시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체첸에 대한 전쟁을 스스로 주도함으로써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을 바라는 국민정서를 자극해 자신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볼 때, 푸틴의 러시아는 미국과 순탄한 협력관계를 펼쳐가기보다는 때로는 긴장을 조성할 개연성이 적지 않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신안보동맹에 맞서 중국에 대한 접근을 촉진시켜 ‘러중동맹’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취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한소수교 이전의 수준으로 복원시키고자 할 것이며 한반도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는 여전히 힘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혼란의 시대’에 빠져 있는 국내 질서를 고려할 때 기강의 확립과 경제의 재생이 1차적 과제가 될 것인데, 경제의 재생을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의 협력이, 특히 G7국가들과의 우호친선이 긴요하다. 또 세계적 흐름은 탈냉전이어서 예컨대 지난 50년대의 러중동맹으로의 회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반도에서도 긴장을 조성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푸틴의 러시아가 걸어갈 길을 주시하면서 적절한 대비책을 세우되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곧 수교 10주년을 맞는 한러 우호관계를 푸틴도 소홀히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