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재단 남북포럼]강원용/여야 손잡아야 통일 앞당긴다

  • 입력 2000년 4월 13일 19시 42분


국토가 분단된 지 55년이 흘러서야 마침내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북쪽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중국 일본 미국 등 어떤 나라와도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남쪽 대통령을 먼저 만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더욱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4대 강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이 회담을 지지해 준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72년 동서독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위한 관계개선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 회담에 큰 기대를 건다. 그러나 나라의 일이란 우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나서 최선을 향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국민의 기대가 큰 만큼 이 회담이 실패할 때 겪어야 할 좌절감과 우리에게 쏟아질 전세계의 차가운 시선을 예상하면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첫째, 감상적인 민족애와 장밋빛 환상에 젖지 말아야 한다. 서울에서 처음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렸을 때를 돌이켜 본다. 매스컴은 온통 ‘피는 이데올로기보다 진하다’며 떠들썩했고, 북한 대표들이 서울에 들어오던 날 온 시민이 길가에 몰려나가 뜨겁게 환영했지만 막상 북한 대표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과 실망에 휩싸였다. 이번에도 최악의 경우 남북간 준비회담 과정에서 의제선정을 하면서 북한이 미군철수 등 전제를 들고 나온다면 회담을 시작하지도 못할지 모른다. 회담이 열리더라도 서로 다른 입장만 확인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끝날 수도 있다. 섣부른 기대보다 실패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둘째, 여야를 막론하고 민족의 과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다. 이번 정상회담 발표가 총선 후에 이루어졌더라면 좋았겠으나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더라도 정치적인 의심의 소지를 남긴 것은 유감스럽다. 이제부터라도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내용에 대해 여야 지도자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눔으로써 초당적인 합의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좌우 양극의 대립을 넘어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셋째, 얼마 전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던 차관회의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남북의 힘이 비대칭(非對稱)인 상황에서 ‘상호주의’를 관철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민족의 공존공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넷째, 남북간에 뿌리깊은 불신의 장벽을 더 이상 두텁게 쌓지 말아야 한다. 남북한이 서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성패의 관건이므로 회담의 의제를 우선 쉽게 합의할 수 있는 몇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과 더불어 ‘참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참된 대화란 상대방의 주장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인도적 차원을 강조하지만 북한은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산가족이 누구나 자유롭게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자는 우리의 요구는 북한체제의 붕괴 가능성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통신왕래의 허용, 특정 지역에서의 상봉 등 북한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첫 단계를 여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비교적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의제는 문화교류라고 생각한다. 우선 실현 가능성이 있는 교류의 계기들을 마련함으로써 차츰 그 폭을 넓혀 가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실현방안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당장 북한이 절박하게 요구하고 우리가 베를린선언에서 약속한 경제협력 문제도 깊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국론의 분열을 피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첫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원칙을 실무협의를 통해 실현해가면서 두 번째 세 번째정상회담으로 이어지고 차기 정권에까지 계승돼 남북통일의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국을 비롯한 대륙권에 가까운 북한과 미국 일본 등 해양권에 가까운 남한이 통일되면 우리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평화를 매개하는 세계평화의 기틀이 되리라고 믿으며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강원용(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21세기 평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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