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신경숙/꽃 새 물 나무 봄봄

  • 입력 2000년 4월 16일 19시 01분


아침에 산에 올라갔다 올 양으로 모자를 챙겨쓰고 등산화를 찾아신고 나오는데 청소부 아주머니가 등을 반이나 꺾고 공동주택 오르막길을 열심히 비질을 하고 있다가 “안녕하세요”, 함빡 웃으며 인사를 하신다. 주름진 얼굴로 보아 쉰은 훌쩍 넘었을 것 같은 데 언제나 소녀같이 웃으며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

▼본이 온 숲속 피어난 꽃들▼

봄이 온 숲속은 요즘 꽃과 새들로 요란하다. 확확 피어난 꽃들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연두색이 좋아지면 더 이상 젊지 않다고 하던가. 확확 피어난 꽃들 속에 여릿여릿하게 터져 나와 있는 연둣빛을 보고 어찌 해찰을 안할 수 있을까.

새들도 다 나와서 아침 빛 속에서 온갖 소리를 내며 지껄여댄다. 까치가 날쌔게 허공을 차오르고 청설모가 쪼르르 나무를 타고 다른 나무로 건너가는가 하면 계곡엔 얼음이 녹은 물들이 찰찰 소리를 내며 잘도 흘러간다. 물 속의 버들치들은 쥐똥나무며 누리장나무들이 바람에 수수수 흔들리는 꼴을 바라보고 있다.

산비둘기 소리를 들어봤는가? 언젠가 산에서 하도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곁엣사람에게 저게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산비둘기 소리라 했다.

무슨 야생짐승이 굴에 갇힌 채 왕왕 거리는 듯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가 이름도 어여쁜 산비둘기 소리라 해서 놀란 적이 있는데 요즘 봄이 온 산 속에 가득 찬 게 또한 산비둘기 소리이다. 자주 들으니 정이 들어서인가. 뭔 새소리가 저리 멋없고 기막힌가 싶던 것이 이제는 새가 저런 소리를 가진 데에는 필경 무슨 연유가 있을 것도 같아 소리나는 쪽을 오래 바라보기도 한다.

노랗게 핀 산수유꽃 곁을 스쳐지나가자니 며칠 전에 부산에 내려갔을 때 만난 분의 얼굴이 꽃 위에 겹쳐졌다.

서점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겸 사인회 자리였는데 예순 가까이 된 분이 책을 내밀며 딸이 며칠 후에 있을 신장이식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글을 쓰고 싶어하는 아이라며 희망의 말을 한마디만 적어달라고 했다. 희망의 말. 펜을 쥔 채 한참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무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마음을 다해 희망의 말을 써주고 싶은데 그저 먹먹할 뿐이었다. 뭐라고 썼던가? 그 순간 마음을 다했는데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어머니의 물기가 밴 간절한 눈빛만 어릿거릴 뿐.

산다는 일은 바로 어제의 일들과 헤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과 헤어지고는 그것을 잃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을 도리없이 견디고 도리없이 지나오는 동안 견고해진 얼굴은 때로 가엾고 때로 징그럽다.

이런 봄날 아침에 산에서 노란 산수유꽃이나 분홍 진달래 속에서 문득 무릎이 꿇어지려고 하는 것은 이 봄날의 이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소멸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마음은 알고 있다.

이 아름다움이 한순간이라는 것을. 이 순간이 곧 지나가리라는 것을. 곧 이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내 계곡의 얼음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가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저 나무의 이름은 무엇일까? 갈라진 바위틈 속으로 가지를 뻗어내린 저 나무의 이름은? 나무와 새와 물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노란 산수유꽃에 대고 얼굴을 알 수 없는 그이의 쾌유를 빌어본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행복▼

천지가 봄인데 이렇게 꽃과 새와 물의 시간인데 어서 쾌유해서 이 지나갈 아름다움을 함께 보자고.

다시 새가 날아오른다. 다시 산비둘기가 왕왕왕 울어댄다. 찰찰 계곡의 봄 물소리를 함께 듣고 있는 아침 햇살도 금세 쨍 소리를 낼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 올라갈 때 인사를 나누었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계단청소를 하다말고 쭈그리고 앉아 종이쪽지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너무 열심히 읽고 계셔서 “뭐 읽으시는 거예요”하고 물으니 아주머니가 환한 얼굴로 “성경말씀이에요” 하신다.

봄날 아침 계단청소를 하다 말고 성경말씀을 읽고 계시는 청소부 아주머니. 그 환한 얼굴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다.

신경숙(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