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현대 사회에서 모호성은 대중의 기호를 자극하는 심리적 측면이 있다. 알지 못함에 대한 신비화, 또는 그 신비화를 기반으로 구축되는 거대한 자본의 재생산 시스템을 주목한다면, 자본이 모호성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물신화해내는 기술의 고도성에 경탄을 하게 될 것이다.
<허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군들을 수평적으로 배치, 특이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한 장의 컷에 그려진 만평처럼 이 드라마의 사건들 사이에서 개연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노력을 요구한다.
이 드라마를 밀고 가는 서사의 힘은 허준과 유도지의 갈등이라는 큰 틀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작은 갈등들이 상호 충돌하고 있다.
그 중에는 허준을 사모하는 예진과 허준의 부인 다희의 애정적 갈등이 존재하는데, 이 갈등은 예진과 소연의 갈등으로 최근 확대되고 있다. 이에 덧붙여 희극적 인물 임오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홍춘과 하동댁의 갈등도 양념을 치고 있다.
흥미롭게도 임오근이란 인물은 허준과 대비되는 인물로서 드라마의 짜임새로 보았을 때 상당히 엉뚱한 설정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이상적 인물' 허준의 반대편에 자리매김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허준이라는 이상적 인물에서 느끼는 시청자의 무거움이 임오근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다.
물론 <허준>의 인기는 이 드라마가 한국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의인(義人)'에 대한 대중의 목마름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는데, <허준>은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문제를 은연중에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허준>이 60~70년대의 계몽적 문예영화와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매한 대중의 계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외로운 의인, 알고 보면 그 의인 역시 과거 신분이 그 대중과 동일했다는 사실, 그리고 마침내 그 의인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적인 역사를 창조한다는 유형을 <허준>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계몽주의 드라마의 특징은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대단원을 위해 이런 종류의 드라마는 '악인'이 아닌 '못된 놈'을 등장시킨다. 다시 말해서 인격적으로 완성이 덜 된 인물과 완성된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나중에 복원될, 또는 새롭게 건설될 공동체에서 모두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허준>의 비밀이 있다. 정작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유도지의 '못된 점'은 현대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권장되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좋은 점이기도 하다.
유도지의 입장에서 공동체는 자신의 이익과 대립될 때 무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것이다. 근대화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공동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립적'이란 말은 '관계를 끊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처럼 '나'라는 존재가 '우리'의 요청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도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출세하는 대표적 인물의 유형이다.
이처럼 <허준>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허준>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대중의 비판의식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과거 잃어버린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대중의 향수를 동시에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동아닷컴 넷칼럼니스트> leetg68@m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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