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병종/中年들 마음 둘 곳 없어라

  • 입력 2000년 5월 14일 19시 29분


한 남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아내를 호주에 보내 주었노라고. 친구가 물었다. 30주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남자가 대답했다. 그 땐 가서 데려와야지. 결혼 생활에 시들해진 중년 남자를 두고 나온 우스갯소리이다.

비단 결혼만이 아니다. 중년은 매사에 설렘이 사라지고 열정이 식어버릴 수 있는 나이이다. 일상사에 쫓기다 보면 문화나 예술에 대한 관심이 특히 멀어질 수 있는 시기이다.

그래서 중년에는 중년에 맞는 문화에 의한 정신의 양육이 필요해진다. 청소년들이 밥만 먹고 자라지 않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 연배의 문화를 섭취하며 정신과 키가 자라듯 중년은 중년 나름의 문화적 영양 섭취가 필요해 지는 것이다.

흔히 중년은 또 하나의 사춘기를 겪는 사추기로 불린다. 그만큼 정신적 정서적으로 무사히 건너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중년은 얼마나 과도히 일하고 지쳐 있는가.

우리나라는 중년 문화의 사막 지대이다. 청소년이나 노년 문제는 거론되어도 중년의 문제는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그 가슴이 메마르다 못해 황폐화되건 말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년에 무슨 문화냐? 예술? 호사스러운 소리 말아라. 그대들은 그저 꾸역꾸역 일이나 하라는 식인 것이다.

중년은 사회의 허리이다. 허리가 부실해서는 사회가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문화가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것은 사실은 허리층인 중년의 문화가 얼마나 튼실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 나라의 중심 문화는 중년층의 수요에 의해 그 행태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년층의 미술관 출입이 많은 나라는 미술 문화가, 중년층의 음악당 출입이 잦은 나라는 음악 문화가 발달하는 것이다. 당연히 중년층의 술집 출입이 잦으면 음주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수천개의 미술관이 있는 일본은 주 관람층이 중년의 여인과 남성들이다.

그들의 문화적 애호가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미술관이 영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중년은 문화로부터 철저히 소외돼 있다. 누가 누구를 소외시켜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년의 문화 소외는 우선 TV로부터 온다. 연예나 오락 프로그램을 비롯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주로 10대를 겨냥하고 있다. 고단하게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중년층이 호젓하게 즐길 만한 프로가 없다.

음악이나 연극 공연장 혹은 영화관이나 미술관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중년의 남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년 남자를 만나려면 새벽의 골프장 아니면 밤의 술집에 가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인 것이다.

중년층이 문화적 안정감 없이 비틀거리면 그 여파가 청년층 혹은 청소년층으로까지 전파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청소년 문제의 상당 부분이 부실한 성인 문화, 부실한 중년 문화로부터 비롯된 것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중년에게 휴식과 교양을 줄 수 있는 TV프로나 공연 예술이 자꾸자꾸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편안하게 드나들며 공부도 하고 정서의 함양을 꾀할 수 있는 미술관 음악당 공연장이 지금의 열 배 정도는 더 생겨나야 한다.

그들이 모여 담소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돼야 하고 그들이 모이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여가를 내 문화와 예술을 공부할 수 있는 장(場)이 열려야 하고 그들의 건강하고 풍성한 담론이 문화를 살찌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중년의 문화 섭취를 대학 때 읽은 몇 권의 고전이나 단편적 인문학의 교양만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화의 세기에 우리 문화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 위기는 공급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요의 위기이기도 하다. 유사 문화의 버블 현상만 가속화되기 쉬운 문화, 즉물적인 문화, 외래적인 문화만이 범람해 있다.

보다 중후한, 보다 심도 있는 그리고 보다 정신적인 동시대의 문화 전통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중년 문화 바로 세우기는 시급하다.

김병종<화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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