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의 증오를 넘어▼
희년(禧年)이란 말이 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유대교의 절기가 바로 그것인데,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해에 종을 놓아주고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매우 뜻깊고 경사스러운 해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인들은 1995년을 희년으로 기대했다. 분단 50주년인 이 해에 한반도와 한민족이 분단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화해와 협력 속에 하나가 되리라고 믿고 또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는 안타깝게도 희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선언을 보면서 우리는 올해가 바로 희년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6·25전쟁 발발 50주년인 이 해에 우리는 마침내 이 땅에서 평화와 통일의 가능성을 읽게 됐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6·25전쟁은 국제냉전과 민족내쟁의 복합 속에서 일어난 참으로 커다란 참극이었다. 우선 국제적 맥락에서 볼 때 그 전쟁은 2차대전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냉전이 소련의 대미 견제전략에 따라 촉발된 열전(熱戰)이었다. 이 전쟁은 자연히 국제전의 성격을 지녔고 남과 북은 일종의 대리전을 치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남과 북 사이의 민족내쟁적 성격이 짙게 깔려 있었다. 상대방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체제 속에 무력을 써서라도 흡수시킴으로써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남과 북 공유의 통일지향적 민족주의가 충돌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는 뜻이다.
37개월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이 우리 겨레 전체에게 강요한 희생은 참으로 컸다. 남과 북을 통틀어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됐으며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그때까지의 세계 전쟁 역사에서 비전투원 민간인의 희생이 가장 컸던 전쟁이 바로 이 전쟁이었으며 거기에 이 전쟁의 참혹성이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우리 겨레에게 남겨준 가장 큰 피해는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적대감, 그리고 복수심이었다. 이 점은 동서독 사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이 증오심의 장벽 속에서 남과 북은 반세기에 걸쳐 군사적 대결을 계속해 왔다.
휴전협정이 남과 북 사이의 직접적 대규모 무력충돌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남과 북은 상대방의 무력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감당해야 했으며 이로써 남과 북은 모두 ‘워페어 스테이트(warfare state)’ 곧 ‘전쟁대비국가’가 됐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웰페어 스테이트(welfare state)’ 곧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흐름과는 어긋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6·25전쟁 발발 50주년의 이 해에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화해와 교류 및 협력을 다짐하는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전쟁이 남긴 멍에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그리하여 남과 북이 함께 평화통일과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공통의 출발점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 출발점으로부터의 첫 번째 중간도착점은 남과 북 사이의 상호인정이며 평화공존이다. 동시에 남과 북은 교류와 협력의 증대를 통해 서로의 신뢰를 쌓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믿음을 높은 수준에서 쌓아올리게 되면 자연히 군비통제와 군비축소도 가능해진다.
한반도 상황이 이렇게 새롭게 바뀌게 되면 현행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가 실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한반도 주변 열강과의 외교적 협조가 더욱 중요해진다.
6·25전쟁 발발 50주년의 이 해를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판삼아 우리 겨레의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승화시키도록 남과 북이 함께 노력하자.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남과 북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역사의식을 지닌 채 실용주의에 서서 투명하게 일을 추진하고 국민은 너무 큰 기대와 조급함을 버린 채 침착하게 협력하도록 하자.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