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모난 수박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비록 겉모양은 네모졌으나 수박으로서의 본질적인 맛과 향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바로 이 네모난 수박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우리 삶이 둥근 수박과 같은 형태의 자연적인 삶이었다면 지금은 인간으로서의 맛과 향기마저 잃은 채 네모난 수박과 같은 인위적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음마저 기계화 되려나▼
오늘 우리들의 삶은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오늘의 속도를 미처 느끼기도 전에 내일의 속도에 몸을 실어야 한다. 나는 이제 겨우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E메일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넷까지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러다가 점점 인간의 마음마저 기계화되고 정보화되는 게 아닌가 두렵다.
나는 아직도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수박보다 어머니가 차가운 우물 속에 담가두었다가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쩍’ 소리를 내며 칼로 잘라주시던 수박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욕실에서 냉온수를 적당히 섞어 하는 샤워보다 어머니가 바가지로 찬 우물물을 끼얹으면서 장난삼아 등줄기를 한 대 ‘탁’ 때리며 해주시던 목물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기보다 아들의 손을 잡고 냇가에 나가 피라미를 잡고 미역을 감고 싶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목가적인 시대는 지나고 말았다.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에 앉아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바라보거나 풀벌레 소리를 듣던 그러한 서정적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다 못해 손에 쥘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마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나는 벌써 몇 해째 서울의 그 어느 집에서도 담장에 수세미가 달려 있는 집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서정을 잃은 산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은 서정을 잃지 않고 있으나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서정을 잃고 있다. 인간은 서정을 잃으면 영혼을 잃고, 영혼을 잃으면 시정신도 잃는다.
언젠가 집사람이 시장에서 무지개떡을 사온 적이 있다. 그 떡을 식구들과 나눠먹으며 “무지개떡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무지개떡 속에는 무지개가 들어 있다”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아빠는 시를 쓰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정말 시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무지개떡 속에는 무지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만 있으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보다 사물의 마음을 먼저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눈만 지닌다면 인간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
▼빌딩사이 초승달을 보자▼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정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서정의 샘물을 찾아 마셔야 한다. 소나기가 퍼붓는 나무 아래 비를 맞으며 서 있어 보기도 해야 하고, 빌딩과 빌딩 사이로 떠오른 초승달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인터넷산업에 의존된 정보친화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네모난 수박’처럼 기계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서정만 잃지 않는다면, 서정의 그 맑은 강물만 마르게 하지 않는다면, 네모난 수박이 수박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듯이 우리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날, 무지개떡을 먹은 날, 인간으로서의 맛과 향기를 잃지 않기 위해 이런 짧은 시도 써보았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리었다
정호승 (시인·현대문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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