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법조계, 군 관계자들은 이같은 의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작업의 하나로 베트남전쟁 당시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을 지낸 채명신(蔡命新·74·예비역 중장)씨를 만났다. 채씨는 68년 7월 작전수행 중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사살하도록 지휘한 혐의로 사형(1심)과 무기징역(2, 3심)을 선고받았던 김종수(金鍾水·59)씨 사건의 관할관으로 최종 서명을 했다.
관할관 확인제도는 군사재판 판결 직후 군사령관이 직권으로 형량을 깎아줄 수 있는 제도. 군은 이를 활용해 김씨를 구제해줄 수 있었지만 판결 결과를 그대로 집행하도록 했다.
―김종수씨는 사고 발생 열흘만인 68년 7월26일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국방부 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너무 가혹했던 것 아닌가.
“군 기강을 엄정히 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당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지상명령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양민을 사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간인을 사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이를 위반한 부하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당연했다.”
―김씨는 베트남 현지 주민 여론 무마용으로 자신이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당시 사살되지 않고 도주한 베트남인들이 사고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하자 베트남 주민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한국군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군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에게 극형을 선고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사건 내용을 전해듣고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고 조사결과를 다 보고받았다. 부하 1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무고하게 희생시키겠느냐. 김씨 사건은 조작되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 주민들의 항의나 시위가 심각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씨에 대한 처벌은 미국의 ‘밀라이(My Lai) 학살사건’ 처리 결과와 비교해 볼 때도 형평을 잃은 것 아닌가(밀라이 사건은 베트남 민간인 504명을 집단 사살한 사건으로 미국의 1심 군사법원은 71년 주범 윌리엄 캘리 중위에게 사형 선고 대신 종신형을 택했다. 캘리 중위는 그 후 3일만에 석방돼 가택연금됐고 74년 10년형으로 감형됐으며 같은 해 사면됐다).
“당시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과 한국의 기본입장이 달랐다. 나는 총사령관으로 민간인을 강간하거나 사살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했다. 그것은 내가 인도주의자 또는 박애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략과 전술이었다. 당시 베트콩은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은 물이요 게릴라는 물고기’라는 이론에 따라 베트남 인민에게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우리 작전의 요체는 그 ‘물과 물고기’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트남 민간인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를 위반할 경우 엄정하게 처벌하도록 했다.”
―김씨 사건 외에 민간인 사살사건이 또 있었는가.
“김씨 외에 10여명이 더 있다. 사건마다 엄정히 처리했다. 전쟁의 규모와 기간 등에 비춰보면 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는 아주 적은 편이다. 일부 언론에서 ‘수천명의 양민학살’ 운운하며 보도하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채씨는 또 “베트남전쟁을 논하려면 전쟁이 무엇인지, 베트남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알아야 한다”며 “베트남전쟁이 부도덕한 전쟁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나도 부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전쟁은 우리가 살기 위해 선택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 베트남에 파병하려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파병했다는 것. 그는 “우리가 참전하지 않고 그 대신 주한미군이 참전했다면 제2의 6·25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