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士칼럼]이어령/걸으면 세상이 보인다

  • 입력 2000년 7월 27일 18시 59분


‘나그네’라는 한국말은 아름답다. 어원을 생각해 보면 더욱 아름답다. 그것은 나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뜰로 나간다. 뜰에서 빗장을 풀고 문 밖으로 나간다. 조금씩 낯익은 것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사람. 그래서 사방의 벽으로부터 벗어나 무수한 문 밖, 그 문과 문 사이의 길을 걷는 보행자가 된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많이 걷는 데 그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는 하루에 기껏 걸어봐야 3㎞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수렵 채집시대의 원인(原人)들은 하루의 보행거리가 30㎞를 넘었다고 한다. 원숭이의 손은 인간과 똑같이 물건을 잡을 수가 있지만 발의 구조는 다르다. 원숭이는 다리로도 나뭇가지를 잡을 수가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잡는 능력보다는 오히려 걷는 능력에서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가 생겨난다. 한마디로 걸어서 ‘나그네’가 된 원숭이만이 인간이 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 만년 이상 공존해 왔다. 옷을 입혀 모든 인종이 섞여 있는 뉴욕 지하철에 갖다 놓아도 조금도 이상하게 바라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네안데르탈인이었지만―몸집도, 두뇌의 크기도, 심지어 장례식을 치르고 꽃을 좋아한 것까지도 인간과 닮은 네안데르탈인이었지만 끝내 그들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빙하기와 함께 절멸하고 말았다. 그들과 호모 사피엔스의 차이는 무엇이었던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왔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유적을 파보면 100㎞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들에게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인류가 탄생한 곳은 아프리카이다. 그 자리에서 그냥 머물러 살아온 인종이 니그로이드(흑인)이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대륙까지 걸어나온 인종이 코카소이드(백인)이다.

그러나 그 한계선마저 돌파하여 산맥과 고원과 동토대를 지나 계속 걸어나간 인종이 바로 몽골로이드(황인)라고 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아프리카 탈출)’에서 인간은 형성되고 그 모험의 역사는 시작된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을 ‘그레이트 저니’라고 부른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편안한 열대의 정글과 초원을 떠나서 눈과 얼음에 뒤덮인 북녘 설원을 횡단해야만 했는가.

걷는다는 것. 나그네라는 것. 밖으로 나가는 보행의 의지와 그 자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걷지 않고 무엇인가를 탄다. 말을 타고 배를 타고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를 탄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보병이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나듯이 궁극적으로 타는 문화는 걷는 문화에 의해서 종결된다. 어떤 승용물도 보행의 의지와 자유를 대신할 수가 없다. 실려 다니는 것이 아니다.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가고 싶으면 간다. 길이 없어도 걸어 나간다. 중력을 거슬러 등뼈를 똑바로 세우는 오기를 두발로 증명한다. 어느 짐승이 이렇게 걸을 수가 있겠는가. 한발한발 앞으로 걸어갈수록 새로운 지평이 다가온다.

그리고 걷는 것만큼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때 비로소 굴러가는 바퀴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여행의 참된 신체성(身體性)을 발견한다. 보행을 통해서 나는 수송된 여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된다. 아주 천천히 나는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나그네의 그 리듬을 상실할 때 모든 승용물들의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

여름 장마가 끝났다. 그리고 휴가는 나그네들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천년의 초원과 빙벽이 있다. 몽골로이드의 길고 긴 보행은 다시 계속된다.

그것이 국경 없는 세계화이든, 사이버스페이스이든, 위험과 희망이 도사린 벤처의 길이든 지금 인류의 그레이트 저니는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경주에서 가장 멀리 온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을 이 천년의 첫 여름에 생각한다.

이어령(새천년준비위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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