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복날을 무사히 넘긴 황구처럼 어절씨구 니나노로 늘어져 태평세월일 수만은 없는 노릇! 하여 이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가솔을 책임진 최씨는 연장을 챙겨들고 새벽 어귀를 나섰다. 공사판 모퉁이에 파리를 날리며 쪼그려 앉아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라도 얻어 마셨는지…. 밀린 임금은 받아 쥘 기미가 어떻게 보이는지….
한편 체통을 지키며 사느라 웃통 한번 시원스레 벗지 못하는 저기 빌딩 숲 속의 신사숙녀들도 오늘 더위먹은 얼굴로 고단한 일상의 가속기를 힘겹게 밟고 있으리라.
그렇다고 궁벽진 시골 동네의 나무 그늘 아래 살고 있는 나라고 하여 매일 신선 놀음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마른 콩밭에 물도 주어야 하고, 도열병이 오지 않았나 논에도 나가 봐야 하고, 때맞춰 견공 3마리의 밥도 챙겨줘야 하며, 명색이 목사인지라 예배 시간이 닥치면 앞 뒤 없는 일장 연설이라도 핏대를 세워야 한다. 더구나 요즘 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여름 손님을 종종이 아니라 줄창 받고 있는 형편이다.
바야흐로 여름 휴가철이 아닌가. 다산초당이라는 관광지 옆 마을에 사는 죄로 나는 유객의 주모 정도로 취급되기 일쑤다. 그 정도까지야 대충 막강 입담과 막강 주량으로 막아온 세월이었는데, 심심한 날 끄적거린 글들이 밖으로 나돌게 된 이후부터 부러 나를 보겠다고 길을 나선 독자들까지 생겨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전에는 팬티 한 장으로 가릴 것만 대충 가리고 웃통은 모두 벗어 젖히고 대자리에 드러누워 침까지 흘려가며 낮잠도 한숨 때리기도 했었지만, 요즘은 누가 갑자기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이다.
엊그제였다. 옷을 못 벗는 대신 중치 막히게 하는 창호지를 모두 뜯어내고 그 자리에 모기장 그물 천을 떠다가 졸대를 대고 못질로 샅샅이 붙였다. 그랬더니 날것들은 걸러지고 서늘바람이 숭숭 방안으로, 내 살갗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더위와 아주 상관없는 냉방이 된 것은 아니다.
바람의 지지부진을 예상하고 준비한 물건이 있으니 바로 요 ‘부채’렷다. 선풍기는 집 식구들 쟁탈전에 여간해선 내 차지가 되기 어렵고 나는 부채에 의지하여 복더위를 물리치고 있다.
내 방에는 부채가 2개 놓여 있다. 하나는 지난 단옷날에 이웃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동네 사는 제자 편에 선물로 보내오신 부채다. 단옷날 부채를 선물하는 고유풍습을 기억하게 해주신 고마운 선물이었다.
선물은 무엇이건 각별한 것이어서 더불어 사는 정(情)과 소중히 여기는 경(敬)을 느끼게 한다. 부채질을 할 때마다 선물한 이의 염려하고 아끼는 마음씨를 기억하게 된다. 여름에는 부채 만한 좋은 선물도 없을 거란 생각이다.
다른 부채 하나는 모악산 시인 박남준형이 무더위를 잘 나라고 보내온 것이다. 직접 그린 그림까지 있어 더위를 날리는 노릇만 하는 게 아니라 볼거리까지 제공하는 부채다. 이들 부채로 나는 꿀잠을 자는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주기도 한다.
‘너희들은 덥거라. 나만은 시원할란다.’ 에어컨을 가동하고 문을 걸어 닫은 공간에서 여름을 나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다. 작은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나면서 아이의 더위를 쫓아주는 아버지도 여기 이렇게 살고 있다. 외갓집을 찾은 손자에게, 또는 병든 이웃집 할매를 향해 부채질을 해주는 할머니들이 있다. 행성의 존망을 염려하는 거창한 구호까지 거들먹거릴 것까지도 없고, 일단 에어컨보다는 부채가 백배 천배 더 인간미가 있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보다는 모기장을 친 방이 훨씬 사람 사는 정감이 감돈다. 현대인들은 수월하고 화끈한 것에, 시쳇말로 쌈박한 것에 홀려 사느라 진화가 아닌 퇴화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난의 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생명의 자생력만큼은 잃지 말아야 할 터인데…. 이 더위에 시원한 냉수 같은 부채 바람을 님을 향해 부쳐주는 사람, 그런 시원한 부채 바람 같은 이웃을 만나고 싶은 바람은 무리한 욕심일까?
임의진(전남 강진 남녘교회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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