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 이듬해인 1921년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백두산을 취재했던 민태원(閔泰瑗)기자의 백두산 등정기 중 한 대목이다.
남측 관광객 110명이 22일 백두산관광에 나서는 가운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민족의식의 상징으로 백두산을 집중 조명했던 사실이 관심을 끌고 있다.
민기자와 동행한 동아일보 사진반도 최초로 백두산 천지 사진을 촬영, 일제하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큰 몫을 했다.
동아일보는 ‘단군 탄강(誕降)의 성지(聖地)요, 근역산하(槿域山河)의 조종(祖宗)’인 백두산을 국민의 의식 속에 심어주고자 선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민기자의 ‘백두산행’은 17회에 걸쳐 신문 1면에 연재됐고 강연회와 사진전시회도 열렸다.
민기자의 기록은 백두산의 경치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과 생태계에 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북선(北鮮)의 풍속은 일가의 생활을 유지하는 책임이 부인에게 있고 그 이상 저축하는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고 한다’고 적어 ‘남남북녀(南男北女)’의 유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풀이를 달았다.
또 백두산 정상에는 ‘대한독립군기념’이라는 문구를 새긴 비석들이 있었다고 전해 산악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백두산에 올라 광복을 기원했음을 증언했다.
1926년 동아일보는 다시 최남선(崔南善)선생을 백두산 참관대로 파견하고 6월 22일부터 3일에 걸쳐 ‘백두산의 신비―동방운명의 암시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여기서도 ‘백두산은 어떤 의미로 보든지 세계에서 가장 신령(神靈)한 산이다.… 신화고 종교고 어느 것이든 백두산을 무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조선인에게 백두산은 신(神)이다’라며 백두산을 통한 민족의식의 자각을 강조했다.
최남선은 7월 28일부터 유명한 ‘백두산 근참기’를 연재,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최남선의 기행문은 웅건한 필체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학술적 고증도 담고 있어 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준석기자>kjs35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