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로 대비되고 있는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차이를 이런 웃음의 문제와 연결시켜 볼 수도 있다. 이 두 영화는 남북 분단이라는 공동 주제에 서로 다르게 접근한다. ‘쉬리’는 웃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장중하고 비장하며 단단하다. 숭고한 비극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반면 ‘공동경비구역 JSA’는 웃음을 잘 활용한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부드럽다. 인간적인 드라마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서 관객들은 대체로 교육받은 것처럼 비슷한 지점에서 웃는다. 이병헌이 “살려주세요”라며 애절하게 매달릴 때, 송강호가 “역시 미제라니까”라며 감탄하거나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우”라고 겁줄 때, 김태우가 고소영의 사진을 자신의 애인사진처럼 보여줄 때 등등…. 역시 웃음은 기대를 배반하거나 너무나도 인간적인 약점을 보여줄 때 유발된다.
하기야 요즘은 ‘호환(虎患)이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썰렁함’인 듯하다. 모임에서 제일 먼저 제거돼야 할 ‘폭탄’은 단연 유머감각이 없는 ‘인간 수면제’들이다. 예전에는 ‘예쁘면’ 무죄였다.
그 다음에는 못생겨도 ‘키만 크면’ 용서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키가 크다고 해도 ‘싱거우면’ 제거된다. 가히 웃음에 갈급증이 걸린, 웃음의 르네상스시대라고 할 만하다. 모든 TV 오락프로에서도 자막이나 말풍선까지 동원해 가며 노리는 것은 오로지 시청자들의 낭자한 웃음소리이다. 그래서 ‘이래도 안 웃을래?’ 하며 친절하게 ‘확인사살’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웃는 우리의 웃음에는 그늘이나 습기가 부족하다. 웃고 나면 그만이다. 심각하고 불편한 것은 싫다. 웃기는 것만 기억이 잘된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따뜻하구만”이라고 김태우를 안으며 송강호가 한 말이나, ‘겨울숲’처럼 얼어 있는 판문점이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곳”이라는 외국인의 말, 이병헌이 “결국 우리는 적이야”라고 울부짖는 말들은 우리의 웃음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왜 갑자기 비극으로 끝나야 하는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움베르토 에코가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의 제2권이라는 상상의 책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웃음이 지닌 ‘두려운’ 기능이었다. “웃기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라는 호르헤 수도사의 말처럼, 삶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울음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정화(淨化)를 지향한다면, 웃음이 주는 페이소스는 희화(戱化)를 추구하니까. 인간의 이성이나 저항은 그런 희화 속에서 나온다.
하지만 지금의 웃음은 우리를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우리들 스스로 웃음 속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볍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게 하기 때문에 가벼운 것이 되고 있다. 과거 3S(Speed, Sex, Sports)가 담당하던 망각과 마비의 기능을 지금은 웃음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치하의 암흑기가 ‘술 권하는 사회’였다면, 현대판 중세인 지금은 ‘웃음 권하는 사회’인 듯하다. 이때 웃음은 ‘21세기의 술’이 된다.
실없는 웃음은 배설일 뿐이다. 필요한 것은 뼈있는 웃음의 소화이다. 물론 웃음은 무거운 울음보다는 가볍다. 그래서 울음이 파도라면 웃음은 그 파도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물거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웃음론’을 쓴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그 사라져 갈 운명의 ‘유쾌한’ 물거품 속에는 소금기의 ‘쓴’ 맛도 담겨 있다. 그러니 진정한 웃음은 쓰고도 무거운 ‘검은 웃음’이어야 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하는.
김미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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