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권력자들과 본질적으로 비슷하게 처신해 온 것이 잘못된 기업인들이었다. 자신들의 과실로, 또는 부패로 기업을 망쳤음이 확실한 경우에도 스스로 ‘퇴출’하는 길을 걷는 대신에 온갖 비리를 동원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빼내 사복을 채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조건 아래 ‘공적 자금’을 받아 살아가는 기업의 임원 가운데 여전히 회사 돈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벤츠를 굴리고 골프장에서 소일하는 경우를 때때로 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해외로 빼돌린 악덕기업인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볼 때, 87년 당시 자살한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은 ‘양심적’이었다고 하겠다.
3년 전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겨우 국가부도를 면하게 됐을 때만 해도 퇴출시킬 기업은 확실하게 퇴출시켜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 남녀노소가 방방곡곡에서 금붙이를 내놓을 때는 정부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결연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어떤가. 사회 전체가 ‘도덕적 해이’에 빠져, 공직사회와 정치권의 부패에 관한 소문은 여전히 무성하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한 기업들의 부패는 동방금고사건의 형태로 빙산의 한 모서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투입된 109조원 수준의 공적자금만 물거품처럼 소진되고 말았다니 기가 막힌다.
이미 물러갔건 남아 있건 정부의 관계당국자들, 해당 은행과 기업의 관련 당사자들 모두 사죄하거나 처벌받아야 한다. 특히 검찰은 동방금고사건, 이른바 ‘정현준 게이트’에 대한 수사를 미적거리지 말고 ‘정현준 사설펀드’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진 여권실세 등 정계 인사 10여명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수사해 국민 앞에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대통령이 “의법조치할 사람은 의법조치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퇴출시킬 기업은 퇴출시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히고 있음은 잠시 분노를 유보하게 한다. 특히 현대건설의 경우, 대주주가 개인재산을 써서라도 회사를 살리지 않으면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고 정부 당국자가 다짐한 대목도 일단 지켜보게 만든다. 현대건설이 어찌 정씨 일가의 것인가. 수많은 직원들, 특히 근로자들의 피와 땀에 국민의 협조로 성장한 기업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사주가 대통령선거에 나서 기업의 기반을 흔들고 ‘왕자의 난’에 ‘이익치 파동’이 겹친 데다가 방만한 경영의 계속으로 부실을 스스로 만들어냈으니 책임있는 관련자들이 사재를 출연해서라도 회사를 살려냄이 마땅하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걱정은 여전히 남는다. 50여 개 기업의 부도와 퇴출에 따라 협력업체들은 줄줄이 무너질 것이고 실업자는 쏟아져나올 것인데 그들의 어려운 생계를 외면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근로자 계층의 실질소득은 줄어들어 빈부격차는 더더욱 확대되고 있다. 사회적 혼란 역시 크게 증폭될 것이다.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는 하나, 영 믿음이 가지 않는 까닭은 지난날의 정부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한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본사 편집·논설 상임고문>
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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