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교수의 희망열기]네 이웃의 종교를 존중하라

  • 입력 2000년 11월 12일 19시 20분


오래 전, 요르단 왕국의 수도인 암만에 들른 일이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한 상점에 들렀다가 뜻밖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메달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여인이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호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옛날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주인의 큰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집에서 쫓겨나 광야를 헤매다가 물이 떨어져 야훼신에게 ‘왜 저희 모녀를 버리십니까’라고 원망섞인 하소연을 하는 장면이다. 남편 아브라함은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작은 아들 이삭을 후계로 삼기 위해 큰아들 모녀를 추방했던 것이다.

그 이삭의 후손이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큰아들의 계통을 밟은 족속이 아랍민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대교 즉 구약종교를 믿고, 아랍인들은 알라신을 섬기는 코란의 신봉자들이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두 민족은 이복형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수천년 동안을 원수로 살아왔고 지금도 적대적인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전 세계가 그들의 평화를 지원하고 있으나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구약과 코란이 안고 있는 교훈이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복수를 정당시하는 잘못된 정의(正義)관 때문이다.

그것을 가르치고 요청하는 신이 바로 야훼이고 알라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비극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대립,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것 같다.

그래서 사상가들은 냉전상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공산주의는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지겠지만 종교 분쟁은 언제 그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걱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은 일시적일 수 있어도, 종교적 신앙의 뿌리는 너무 오래 민족들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교가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하나가 된다면 그 비극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며 또 해결의 가능성도 찾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편견과 독선에서 오는 불행과 범악(犯惡)이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가슴 아픈 사실이다. 편협스러운 독선적 신앙에 빠진 개신교도가 천주교 성당에 들어가 방화를 했다는 사실, 어떤 성직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어린 학생들이 수업중인 학교에 들어가 단군상을 파괴했다는 일들은 종교적 신앙을 따지기 전에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시민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심하게 되면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사찰에 들어가 불상들을 훼손했다는 보도에 접하기도 한다. 또 지성인이나 지도층 인사들 중에도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의 신도이기 때문에 법과 윤리와는 상관없이 특혜를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다면 잘못된 종교 때문에 오는 피해와 불행을 다른 선량한 국민이 분담해야 한다는 모순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진정한 종교가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신념은 대립이나 투쟁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서로 위할 수 있는 인격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봉사와 희생의 정신을 민족간의 갈등속에서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편견이나 독선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종교는 과학과 도덕으로 채울 수 없는 인간애를 충족시키는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 신앙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 형 석 (연세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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