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정치의 힘’에 기대지 말자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34분


사은회((師恩會)를 하자며 4학년 학생대표가 찾아왔다. 취직들을 못해서 난리인데 웬 사은회냐고 위로 겸 반문을 하는 마음이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조그만 사업을 하는 친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또 사무실을 줄여 이사를 했다고 한다. 3년 전에는 그나마 사정이 좋았다. 그 동안 벌어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까먹으며 버티면 되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막막하단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정치인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태세이다. ‘준비된 대통령’의 실체가 고작 이 정도인가. 야당 총재 눈에는 나라 무너지는 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 판국에 골프채를 신주 모시듯 하는 사람, 때 이른 대권 행보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사람, 이들이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가. 그야말로 민심이 요동을 친다.

▼정치인이 해결사 될수 없다 ▼

사실 다들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저력을 놓고 볼 때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부터 욕심을 버리면 안될 것도 없을 듯싶다. 집권도 해보았겠다, 남북관계의 물꼬도 텄겠다, 거기에다 노벨상까지 탔겠다, 더 무엇을 바랄까. 까짓 집권당 총재 자리 훌훌 털어놓고 그야말로 큰 정치 제대로 한번 펴면 왜 안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야당이라도 먼저 나서서 나라 살림을 챙기면 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중간’만 하면 차기는 따놓은 당상 아니겠는가. 우리라도 ‘통 크게’ 나가보자. 이러면 다정다감한 우리 국민, 왜 힘을 모으지 못하겠는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기대가 모두 부질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여전히 말만 필사즉생(必死卽生)이지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야당 총재는 말만 상생(相生)이지 실제로는 ‘좁쌀정치’ 외곬 관성을 못 버릴 것이다. 한두 사람의 ‘의인’(義人)만 있어도 상황이 달라질 텐데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박복하단 말인가. 장탄식이 절로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영웅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슈퍼맨처럼 온갖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초인 같은 존재는 원래 드문 것이다. 미국과 페루와 일본, 아니 전세계에 걸쳐 리더십의 위기현상이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처음에는 철인왕(哲人王)을 그렸다. 지혜의 화신, 그러면서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할 위대한 정치가가 있어야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철인왕은 없다. 그래서 인간 대신 법에 의한 지배를 꿈꾸게 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인치(人治)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3년 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간청해야 하는 위기국면에 몰렸을 때, 우리도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나라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러나 그 때뿐이었다. 여전히 한두 사람의 정치인들이 해결사 노릇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제도가 살아 움직이지 못하니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요지경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 대한 과부하(過負荷)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제 몸 하나 주체 못하는 정치에 모든 것을 내맡겨 놓았으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법과 경제 원칙대로 움직여야▼

그러나 정치를 오늘날 이 모양의 기형으로 만든 데에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업 하는 사람은 걸핏하면 권력에 기대어서 눈먼 돈을 벌려고 했다. 법을 지키고 집행해야 할 사람들도 정치권 눈치보는 재미에 벗어날 줄 몰랐다. 노동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원망스럽고 야당총재가 실망스러운가.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고 외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먼저 채찍질해야 한다. 경제는 경제 논리대로, 법은 법 고유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정치에 의탁해서 부당이익을 취할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치의 외압도 막아낼 수 있다. 제도가 살아야 정치도 살아나는 것이다.

정치의 역할과 기능과 위상에 대한 구조조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바쁠수록 정도를 걸어야 한다. 어떻게 체득한 교훈인데, 벌써 잊어서야 되겠는가.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