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미국 상원의원 시절에 펴낸 ‘위기의 지구(Earth in the Balance)’에서 고어는 과학기술, 특히 환경문제에 관한 높은 식견과 통찰력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범지구적 프로그램인 ‘지구환경판 마셜플랜’을 제안한 것이다. 고어는 대통령 선거 출마에 즈음해 1999년 말에 새로 쓴 머리말에서 21세기의 첫 10년은 환경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쟁력-삶의 질 기술에 달려"▼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고어 진영의 핵심 선거전략은 공화당 집권의 경제정책 실패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고어의 아이디어가 큰 몫을 했다. 고어는 정부의 강력한 기술정책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약화됐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클린턴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만이 미국을 다시 초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클린턴의 기술정책에 관한 선거공약은 취임 후 한달 만인 1993년 2월에 발표된 ‘미국 경제성장을 위한 기술’이라는 문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 문서에서 클린턴 정부는 고용을 창출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경제성장, 생산성이 높고 국민의 필요를 신속하게 충족시키는 정부, 기초과학에서 선도적 위치 유지 등 3가지를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과학기술이 추진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1993년 9월 고어 부통령은 ‘국가 정보 인프라(NII)에 관한 행동의제’를 발표한다. 국가 정보 인프라는 다름 아닌 정보고속도로이다. 컴퓨터 TV 전화 팩시밀리가 모두 연결돼 데이터 영상 음성 등 각종 정보가 초고속으로 전송되는 정보사회의 하부구조이다. 1990년 상원의원 시절 고어가 제출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법안이 기초가 됐음은 물론이다. 클린턴―고어의 정보기술 지원을 계기로 불붙은 디지털 경제 덕분에 클린턴 집권 8년간 미국은 유례 없는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1993년 11월 고어 부통령 중심의 행정개혁팀은 과학기술정책 조정기구의 운영체계에 일대 수술을 가한다. 먼저 연방정부 차원에서 종합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국가과학기술심의회(NSTC)를 설치한다. 이와 동시에 백악관 내의 정책 조정기관으로 대통령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가 신설됐다. 위원장인 대통령 과학기술보좌관을 제외하고 전원이 민간대표인 대통령 조언기관이다.
1999년 고어 부통령은 PCAST에 과학기술이 미국 경제와 미국 시민의 복지에 기여하는 방안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요청했는데, 21세기에 번영을 가져올 과학기술로 정보통신 생물의약 식품 환경 제조 지구위치측정(GPS) 등 6대 분야가 보고됐다. 2000년 봄에 발표된 이 보고서의 인사말에서 고어는 “우리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경제의 경쟁력, 가족의 건강, 삶의 질이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고어의 진면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나노기술(nanotechnology)이다. 1992년 6월 어느 날. 미국 상원 소위원회에서 30대 후반의 감정인이 고어와 나노기술에 대해 열띤 일문일답을 하고 있었다. 감정인은 에릭 드렉슬러. 그 당시 나노기술의 실현 가능성을 믿고 있던 과학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드렉슬러는 몽상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정책 입안자들이 나노기술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우리 지도자 과학소양은 몇점▼
2000년 1월 클린턴 대통령은 ‘국가 나노기술 구상’을 발표했다. 2001년부터 6000억원이 투입되는 개발 계획이다. 클린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노기술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모든 정보를 각설탕 크기의 한 개의 장치에 집어넣을 수 있는 기술’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 9월 미국에서 개최된 한미 과학기술포럼에서 나노기술 연구사업의 상호참여에 합의했다.
육군 장성이나 정치 9단들이 청와대를 거쳐가는 우리네 풍토에서 고어부통령처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정치지도자가 배출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는지 모른다. 2002년 대선에서 입후보자들의 과학기술 소양을 검증하는 토론회가 단 한차례라도 열리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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