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최윤희/'행복자판기'있었으면…

  • 입력 2000년 11월 26일 18시 38분


평소에 나는 인물 덕을 상당히 보는 편이다. 조립이 탁월한 미모가 아닌 탓에 사람들은 나를 보면 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단정하게는 보여야 하니까 강의하러 갈 때면 일단 화장실부터 간다.

며칠 전에도 강의를 위해 어떤 건물에 도착해서 화장실을 찾았는데 이상하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힘껏 문을 밀었더니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던 아줌마가 ‘미안해요’ 하면서 일어났다. “아유, 미안하긴요. 근데 되게 특이하게 앉아 계시네요.” 우린 마주보고 웃었다.

새벽 5시 출근에 오후 5시 퇴근.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의 도시락을 챙겨주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난다는 아줌마. 한달 내내 온갖 더러운 청소 다하고 받는 돈이 기껏 40만원. 게다가 아줌마는 별난 성격의 남편 때문에 퇴근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남들은 돈주고 운동하러 다니는데 아줌마는 돈 받으면서 운동하는 거니까 ‘따따블 복권’에 당첨되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맘 편하겠죠?” 아줌마 얼굴에 잠깐 생기가 돌았다.

내가 수원역에서 만난 할머니 거지는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그날도 강의가 있어서 수원역에 도착했는데 나는 평소 한시간 정도는 일찍 가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터프한 동작으로 담배를 꼬나문 채 외쳤다. “춥고 배고픈데 100원만 주세요!”

호기심의 천재로 통하는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매운탕 한 그릇 사드릴까요?” 할머니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난 하루 세끼 ‘얄짤없이’ 챙겨먹어!” 100원씩 달라는 생각은 누가 한 걸까? “4000만 국민이 100원씩만 줘봐. 40억이잖아?” 나는 쭈그리고 앉아 할머니와 함께 영업을 했다. 1000원짜리 지폐를 주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동전만 남기고 재빨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아이디어가 깜찍한 할머니가 예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몇달 전에는 2박3일 동안 병원에 있었다. 래프팅을 너무 열렬하게 한 탓에 무릎 연골이 파손됐다. 수술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고는 주사도 못맞는 겁쟁이답게 하염없이 울었다. 담당의사는 나를 만나자마자 농담을 던졌다. “아니 이 연세에 운동선수들이 하는 수술을?”

나의 병실 룸메이트는 100만달러짜리 할머니였다. 오른쪽 어깨에 인공관절, 왼쪽 무릎에 인공관절, 틀니에 위수술, 디스크, 이번엔 왼쪽 어깨가 부러져 입원했다. 몸이 편찮은 할머니는 만사가 못마땅했다. 얼굴에는 기본 주름말고도 ‘초가집’ 서너채가 더 그려져 있었다.

“할머니, 꽃다운 열세살 얘기 좀 해주세요.” “열세살? 우리 영감 첨 만났을 때여….” 할머니 눈에는 금방 복사꽃이 피어났다. 내가 먼저 퇴원할 때 할머니는 “축하해줘야 하는데 미안하구만 그랴”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그 후 무릎이 성치 않아 택시를 자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하루에 3만 마디 말을 하지 않으면 몸에 노폐물이 쌓인다던가? 택시를 타면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운전사에게 꼭 말을 건넨다. “요즘 힘드시죠?” 운만 떼면 대개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온다. 힘들다던 아저씨는 공적자금 얘기를 하다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냉각수’를 뿌려야 했다. “되게 정열적이신 걸 보니 연애결혼 하셨겠어요?”

목적지에 도착해 미터기를 보니 1만2800원. 나는 2만원을 드리며 ‘아저씨 마음대로 거슬러 주세요’ 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마음 같아선 다 드리고 싶지만 사실 저도 소녀가장이거든요.” 아저씨가 처음으로 껄껄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들에게 행복자판기 한 대씩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커피자판기는 동전을 넣어야 하지만 행복자판기는 마음만 클릭하면 행복이 와르르르! 하늘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께 투덜댄다. “제발 모든 사람 다 행복하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하느님한테 손해될 게 뭐예요?” 가당찮은 나의 협박성 기도가 필요없는 세상, 그때가 언제쯤에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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