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윤기/큰눈 온 다음날의 자술서

  • 입력 2001년 1월 14일 18시 48분


도시 생활 30년, 미풍양속 잊은 지 오래라는 것을 큰눈 온 날 아침에 깨달았다. 시골 마을에서 바라본 보름 전날 달밤의 설경을 앉아서 즐긴 것이야 큰 허물이 아니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랫집 식구들이 모두 나와 눈을 치우면서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가서 아침 인사라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몇 분을 허비했다.

그런데 눈 치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아뿔싸 싶었다. 마을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마을의 그 길로 자동차를 몰 일이 없는 사람들까지 가세해 눈을 치우고 있었다. 황급히 내려가 한동안 부역(賦役)한 뒤에야 내 집 앞길을 치우기 시작했다. 세 시간 걸려 산길 약 200m를 뚫고 나서야 자동차를 몰고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

마을로 내려오면서 몹시 놀랐다. 30㎝ 가까운 폭설이 쌓여 있었을 텐데도 동구까지, 700∼800m 되는 길이 자동차가 내려갈 수 있도록 빠끔하게 뚫려 있었다. 집집의 대문 앞 50여m 구간은, 어찌나 쓸었는지 눈이 내린 흔적조차 없었다. 자동차 바퀴 들어갈 만큼만 되게 길을 뚫고 나온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자동차 길이 말갛게 뚫린, 눈에 묻힌 시골 마을은 언필칭 한폭의 그림이었다.

매스컴의 집중포화 덕분일 테지만 고속도로도 잘 치워져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려 수도권으로 들어오면서도 나는 큰눈 내린 다음날의 고층 아파트촌 풍경을 그릴 수 없었다. 그렇게 큰눈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기가 쉽다. 하지만 내가 수도권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큰길은 생지옥이었다. 염화칼슘을 뿌린 탓인지, 폭설이 고스란히 길 위에서 자동차에 밟히면서 녹아가고 있었다. 버스가 고속으로 잔설과 물이 반반인 진창을 가르고 달리면서 보도쪽으로 시커먼 흙탕물을 퍼붓는 바람에 행인들은 보도 바깥쪽으로만, 그나마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의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했다.

아파트 단지의 눈은,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에게 밟혀 잘 다져진 채 그대로 고스란히 빙판으로 남아 있었다. 200m 되는 길을 손수 뚫고 나온 것이 자랑스러웠다. 700∼800m에 이르는 마을길을 닦아준 마을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런 길을 내려와, 고속도로 80여㎞까지 잘 달려온 자동차가, 수도권의 200m도 안 되는 고층 아파트 단지 진입로에서 거북이 걸음을 면하지 못한 사태를 설명하자면 우리는 그만 우울해지고 만다. 대도시의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손으로 눈을 치우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빼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주민들 모습은 흡사 제 집 뒤지는 경찰관 앞에, 당혹한 구경꾼 모양을 하고 선 무정부주의자 같았다.

끝없이 작은 꿈을 꾸면서, 끝없이 그 작은 꿈을 이루면서 살다가 큰눈 오던 날 밤에 이승을 떠난 동화작가 정채봉의 빈소에서 정채봉과 함께 큰눈이 화제에 올랐다. 산중에 사시는 법정 스님의 한 말씀이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퇴원한 직후, 정채봉씨를 산골로 보내는 걸 그랬어요. 산골로 보내어 산 기운도 받고 땅 기운도 받게 할 걸 그랬어요. 산골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제 손으로 눈을 치워야 물도 길어올 수 있고 뒷간도 다녀올 수 있거든요. 사람은 그렇게 살면 튼튼해지게 돼 있어요.”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서로는, 산업의 발전이 인류에게 편리와 행복을 약속할 것이라는 19세기 민중의 보편적 기대 심리에 엄중한 경고를 보낸 분이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검박한 삶을 실천해 보이던 시인이자 ‘월든’의 저자인 서로의 말 한 마디 들어둘 만하다. 그 울림이 실로 크다.

“한 농부는 내게 ‘채소만 먹고는 못삽니다. 뼈가 될만한 성분이 하나도 없거든요’하고 말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가 하니, 풀만 먹고도 쟁기를 끌고 있는 소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그런 말을 했다.…개개인이 홀로 서기를 하던 고대인들에 견주면 우리는 얼마나 소인배들인가. 지적 비상(知的 飛翔)에 관한 한 현대인은 신문의 칼럼 이상의 높이로는 결코 날아오르지 못한다.”

이윤기(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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