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국민을 어떻게 보기에…

  • 입력 2001년 1월 16일 18시 31분


제가 살고 있는 안양에 빙상경기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구경도 할 겸 지난 주말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러 갔지요. 아이스하키는 워낙 몸싸움이 격렬한 운동이지 않습니까. 저는 환호하는 관중 사이에서 이 ‘육박전’을 운동 경기로 승화시키는 비결이 무엇일까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엄격한 규칙과 그것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심판의 존재였습니다. 3명의 심판은 넓지 않은 경기장을 빈틈없이 살피며 반칙을 한 선수에게는 어김없이 벌칙을 주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 할 것 없이 벌을 받았습니다. 아이스하키가 감동을 주는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의원 이적' 사전에 몰랐다고▼

자꾸 우리의 정치판이 생각났습니다. 명색이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정치인이 거짓말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잘못이 있을까요. 그야말로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일이지요. 아이스하키로 치면 ‘완전 퇴장’ 감이지요. 지난 연말, 민주당 소속 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입당하면서 집권층 인사들이 무수한 거짓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페널티를 받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나 민주당 대변인 같은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충격적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에서 자발적으로 내린 결단’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압권은 김중권 민주당 대표였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사전에 논의한 일이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소도 웃을 일이지요.

그러나 거짓말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우선 김대중 대통령부터 털어놓았습니다. ‘세 사람을 자민련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속마음을 내비쳤거든요. 보다 결정적인 단서는 박상규 민주당 사무총장이 제공해주었지요.

또 한 명의 민주당 의원이 고무신을 바꿔 신은 그 날,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이실직고했거든요.

전후 사정이 이런데도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거짓말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책임자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대한민국 정치를 위해 이래선 안되겠다 해서 세 분이 오셨는데, 누가 그걸 가타부타 할 수 있느냐’고 눈을 부라리기까지 합니다.

하기야 그 사람다운 발상이지요. 김종필씨는 불과 8개월 전 김대통령을 향해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며 온갖 험구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과의 공조는 더 이상 없다’고 만천하에 선언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합니다. 그때는 ‘화가 나서 그랬다’나요. 완전히 ‘주유소 습격사건’ 수준이지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도대체 국민을 어떻게 보기에 이런 작태를 서슴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나 정작 제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불감증’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그러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철면피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가해야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제대로 야단도 치지 못하고 벌써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러니 ‘반칙왕’이 천하를 호령하는 것 아닙니까.

독한 마음으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언필칭 김종필씨가 되뇌는 ‘희망의 나라’를 만들자면 그를 포함해서 진실을 욕보이는 사이비 정치꾼들을 완전히 퇴장시켜야 합니다.

그러자면 전국의 유권자들은 이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가 3년 후에 매서운 벌칙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시민단체들도 이번에 이들이 내뱉은 말들을 꼼꼼히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언론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최소한 거짓말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만은 집요할 정도로 비판을 가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집요하게 비판 가해야▼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전투적’인 발언을 해야 하는 제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부장관 지명자가 불법체류자를 가정부로 썼다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사퇴한 것을 보셨지요.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도 ‘맑은 물’ 마시며 살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만듭시다. 그리고 저들의 이마에 붙여 놓읍시다. 그래야 희망의 샘이 솟을 것 아닙니까.

서병훈(숭실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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