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양수길/윤리빠진 성장은 '모래성'

  • 입력 2001년 2월 15일 18시 54분


날벼락과 같은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시민들은 눈물겨운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실업사태를 겪는가 하면 정부는 금융과 기업을 개혁하고자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 때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회계장부를 조작해 국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을 불법대출하고 이를 해외로 빼돌리고 있었으며 그 돈은 지금 종적이 묘연하다고 한다.

이런 비리가 이뤄지는 동안 빚더미 위에 서있던 대우그룹은 끝내 해체됐고 김회장 자신은 도망자 신세가 돼 해외에서 잠적했으며 상당수의 대우 임원들은 비리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됐다. 대우그룹과 그 총수의 참담한 말로이다.

▼비극으로 막내린 김우중 신화▼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재벌총수가 된 김회장은 60년대 초 이후 30여년간 지속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참담한 말로는 개인 차원을 초월하는 시대적 비극이요 세계적 스캔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김우중 신화의 비극적 귀결에는 지금의 우리를 위한 역사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것은 사회윤리의 중요성이다. 즉 지속적 경제발전은 사회윤리를 바탕으로 삼아야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회계조작 및 불법대출과 비자금 운용이 기업가로서 비윤리적인 행위임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런 행위들이 대우 역사상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나아가 고도경제성장기 전반을 통해 대기업들에 만연했다고들 한다. 이것은 곧 고도경제성장 자체가 기업인들의 비윤리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상 고도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정부는 비윤리적 기업행위를 눈감아주고 심지어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도성장 일변도의 경제발전 추진과정에서 정부는 기업들의 외형위주 성장을 독려하고 지원했으며 대기업들은 외형의 확대와 유지를 위해 정부의 용인아래 이른바 회계분식과 불법적 행위를 통해 금융자금을 끌어다 쓰면서 다분히 허구적인 가치를 창출해 왔던 것이다.

그 만큼 우리나라의 고도경제성장기록에 허구성이 개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허구성이 끝없이 지탱될 수는 없다. 김우중신화와 고도경제성장시대의 종언은 그 결과로 온 셈이다.

이런 우리의 경험은 사회적 윤리의 기반 없이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준법정신과 책임감, 시민정신과 같은 최소한의 사회적 윤리 없이는 경제 주체들 사이에 신뢰가 성립될 수 없고 시장경제제도도 뿌리내리고 작동될 수 없다. 그 결과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려는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해진다.

지금 정부의 시장개입에 대한 비판이 자자하고 기업자유에 대한 요구가 고조되고 있다. 이런 비판과 요구에는 반성할 점이 없지 않다. 구미 선진국에서 경제학이 가르치는 자유기업론은 기업의 이윤극대화가 허용되면 사회적 공익이 거둬질 것으로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모델은 기독교적 윤리와 준법정신을 근간으로 건전한 사회적 윤리가 정착돼 있는 사회를 전제로 개발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윤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시장경제는 물론 민주주의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작동할 수 없다.

▼기업-정치 윤리강령 선포를▼

우리는 지금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윤리적 기반이 너무나 황폐하다. 건전한 사회윤리를 정착시켜야 한다.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부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지각 있는 사람들의 솔선수범 하에 추진돼야 한다. 기업인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건전한 기업윤리와 건전한 정치윤리가 추구돼야 한다. 우선 뜻 있는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기업윤리와 정치윤리 강령을 채택해 선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포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벤치마킹이 뒤따라야 한다. 즉 선포된 강령을 기준으로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평가해 나감으로써 그 실천을 촉진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이들을 독려해 그런 운동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외환위기 직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필자와 조우한 김우중회장은 “무엇을 잘못했다고 재벌들을 나무라느냐”며 항의했다. 지금쯤 그 대답은 명백해졌다.

양수길(세계경제연구원 객원학자·전 주 OECD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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