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구효서/비유는 없고 가십만 남아

  • 입력 2001년 2월 18일 18시 25분


을지문덕 장군이 유명하고 우러름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30만명의 수나라 선발대를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무찔러 압록강 너머에 있던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예비군 200만명의 공세를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1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을지로가 있고 을지훈련이 있고 을지무공훈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을지문덕이 지었다는 이른바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우리는 중등학교 한문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짧은 시인데 고구려를 침범한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냈다는, 시라기보다는 일종의 편지인 셈이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하고 이만 그쳐주게나’라는 뜻이다.

언뜻 보면 우중문의 계략과 전술을 두려워하고 그의 호전적인 성격을 달래려는 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을지문덕이 자신의 거짓 패배와 유인책을 은근히 시인하며 이제야 당신을 공격하겠다는 일종의 포고문과도 같은 글이었던 것이다.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적장에게 보내는 전언에도 예를 갖추며 기개를 내보이는 품격이 잘 나타나 있는 오언고시(五言古詩)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이 문덕(文德)인 까닭을 알 것 같지 않은가.

요즘 세상을 어지럽히는 언쟁과 성명과 이른바 논평 따위에는 그런 예의와 기품 같은 것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접촉 사고를 내고 길바닥에서 삿대질하는 두 운전자의 말씨름처럼 들린다. 거기엔 비유가 없다.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은근히 빗대어 나타냄으로써 감정의 예각을 스스로 감추고 상대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라면 은유적 수사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기껏해야 ‘파렴치한 작태’라느니 ‘어설픈 정치적 술수’라는 직설적 성토들뿐이다.

상대파당에 대한 기민한 비판과 논평이 필요한 정치판에서는 조크라는 것이 그나마 비유적 수사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최소한의 여유와 예절마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대당의 특정 의원이 다시 정치적 공세를 퍼부으면 ‘작살’을 내버리라고 메모를 전달하거나, 그 메모를 적발한 상대당이 예결위 회의까지 거부하는 것, 그리고 어느 당 총재가 전철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에 대해 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 일을 매우 중대하고 본질적인 사안으로 비치게까지 한다.

비유의 기능들이 실종된 사회의 문제는 이처럼 본말이 전도되고 경중(輕重)이 자리를 뒤바꾸어 앉는 위험이 초래된다는 데 있다. 결국 나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식의 싸움으로만 치닫게 되고 마는데 과연 그런 싸움에 끝이 있겠는가.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소통이란 것에도 옛날 서신(書信)에서 볼 수 있었던 진솔한 표현이나 서정적 은유는 찾아볼 수 없다.

화상채팅용 카메라를 장착해놓고 ‘내게 ××를 보여줘’라며 보챈다. 대화라고 해봤자 맞춤법이 파괴된 뚝뚝 끊어지는 두 세 마디가 고작이고, 두 세 문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욕설이 난무하고 심지어 싸움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져 독극물 테러마저 기도된다. ‘널 사랑해’라는 제목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낸다. 무분별한 욕망의 빠른 성취 욕구 앞에서 고상한 비유는 설자리를 잃는다.

고려 왕실을 버리고 이성계에게 붙겠는가를 떠보기 위해 정몽주에게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라는 단심가(丹心歌)로 답했다고 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각각 전하는 이 시들의 정확한 사실관계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후학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은 정적을 대하는 데에도 격조를 잃지 않았던 선조들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가 아직도 유효한 세상이기를….

구효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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