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병종/위인전 없는 시대

  • 입력 2001년 7월 8일 18시 52분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었을 때였던가 보다.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늦잠꾸러기인 내게 읽히려고 아버지가 놓아 둔 것이었다. 라몬 막사이사이 전기. 책의 여기저기에 시뻘겋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중엔 이런 문장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린 소년 막사이사이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아버지를 도왔다.”

성웅 이순신, 넬슨 제독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베토벤 전기. 그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서 발견되었던 책들이었다. 위인전에 의한 아버지의 이런 식의 무언의 교육은 그 분이 작고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러닝 바이 모델(Learning by model)이라고 했던가. 사람은 확실히 모델에 의해 학습되는 동물인 것 같다. 내게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애국이니 애족이니 하는 개념이 달라붙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어렸을 때 읽은 위인전의 덕이 크다. 사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를 키운 건 8할이 위인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어린 시절의 책 체험 때문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책이 영혼의 양식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종종 책방에 나가서 호된 배신을 당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섭섭하게도 눈에 띄는 그 많은 책들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나마 영상세대의 눈에 띄려면 가벼워지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책의 운명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옛날의 내 아버지를 흉내내어 가끔 위인전이나 전기를 골라 와서 아들 녀석의 머리맡에 놓아보곤 한다. 물론 읽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어렸을 적 머리맡의 위인전을 발견하던 그 추억을 되살리며 좋은 책을 만나면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 한 두 페이지씩을 읽곤 한다. 얼마 전 한꺼번에 두 권의 좋은 책을 만나 잠자리가 행복해졌다. ‘낙동강 소금배’와 ‘단순한 기쁨’.

한 분은 한국의 원로목사이고 한 분은 프랑스의 원로신부이다. 두 저자는 각각 1913년과 1912년 생이니 미수(米壽)를 넘기신 분들이지만 아직 정정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낙동강 소금배’의 저자 전성천(全聖天) 박사는 그 삶 자체가 경이롭다. 아직 한반도가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을 때 경북 예천의 한 산골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도쿄(東京)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가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 곳에서의 교수 자리 제의를 마다하고 귀국하여 잠시 고위 공직자의 자리에도 있었지만 생애의 태반을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 보내왔다. 노동운동, 빈민운동의 현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많은 개척교회를 세웠다. 성서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해 낸 것이다.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은 프랑스판 ‘낙동강 소금배’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물려받은 많은 유산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전후에는 잠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지만 곧 ‘엠마우스’라는 빈민 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부랑자, 전쟁고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왔다.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추앙받는 그의 생애는 영화로, 책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바 있다.

두 권의 책은 위인전이 아닌 전기이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걸어갔다는 점에서 어떤 위인전보다 더 감동적이다.

요즘 우리의 아이들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옛날의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장하고 인물 또한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 영혼은 너무도 허약해 보인다. 아직도 책이 영혼의 양식임이 분명할진대 그들이 그 영혼의 양식이 될 만한 책을 너무도 빈약하게 섭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파르게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사표가 될 만한 마음속의 위인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오직 TV 속의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만이 청소년의 우상이 되고 있는 이 세대를 나는 우수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읽건 말건 자녀의 머리맡에 위인전 한 권씩을 놓아 보자.<본사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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