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자가 돼 보겠다고 시험을 치를 때 면접을 보던 방송사 간부가 물었다. 20대 내 시나리오의 컨셉트대로 당당하게 씩씩하게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방송은 글이 아니라 말이잖아요. 말 잘하는 여자가 유리하지요. 방송기자는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꼭 20년 전에 나는 방송을 모르고 방송기자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아나운서는 알아도 ‘방송국에 기자도 있어요’하고 물을 정도로 방송기자는 ‘신종직업’쯤 되었다.
그러나 방송국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뭘 몰라도 단단히 몰랐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방송통폐합 직후였기 때문이다. 대학 선배들을 따라 슬쩍슬쩍 구경했던 신문사 편집국의 활기, 거창한 일을 하는 척 심각한 표정으로 글을 쓰던 기자들의 귀여운 치기조차 방송국에는 없었다.
조용했고 고요했으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바쁘게 일들을 했다. 갓 들어온 신참에게 정겨운 말 한마디 건넬 여유조차 그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자막 스캐너 작업을 하던 선배는 내게 말했다. ‘실수하면 안 돼-그러니까 잘 봐둬.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면피할 수 있게 확실히 봐 둬야 돼.’ 나는 왜 그렇게 ‘면피’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알게 됐다. 당시 방송 통폐합 이후 나의 첫 직장은 일종의 ‘난민보호소’였기 때문이다. ‘방송개혁’이란 이름 아래 하루아침에 방송계가 거대한 두 방송사로 개편됐기 때문이다. ‘원주민’은 ‘원주민’대로, ‘난민’은 ‘난민’대로 그 상황에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불만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난민’ 선배들은 눈물을 뿌리며 여의도행 버스를 탔노라고 했다. 단말마와도 같은 마지막 방송을 하고 단체버스에 실려 허허벌판인 여의도에 왔을 때 거대한 방송국 건물을 보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직당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치사해도 더러워도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상처입었고 ‘기자로서 사형’이 집행된 동료들을 본보기로 보았다. 두려워했고 공포에 떨었다. 한번 당해본 그들은, 태엽이 감긴 인형이 온순하고 말 잘듣고 미동도 하지 않듯이, 81년도의 방송기자들은 그렇게 ‘여성’적이었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말할 능력조차 잃어버린 ‘실어증’에 걸린 여자였던 것이다. 그 여자는 오로지 ‘힘있는 자’가 원하는 것만을 그대로 읽어대기만 했다.
세상일은 묘하게 반복된다. 이번에는 신문 차례다. 애초 ‘어떻게 될까?’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말했다. ‘80년 초와 똑같이 될 거야’라고. 이미 몇몇 신문들은 벌써 납작 엎드렸다. 한번 해보겠다던 신문들은 ‘전사통지문’에 이름만 적을 순서만 남겨놓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개혁을 지지한다. 언론도 분명 개혁할 요소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개혁이야말로 추진하는 쪽이 그 누구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 없는 깔끔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개혁주체의 도덕성과 윤리성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만 한다. ‘왜’, ‘무엇 때문에’, ‘하필이면 지금’ 등등의 수많은 의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 않은가.
왜 재벌개혁이 실패했고, 교육개혁이 만신창이가 되었는가? 지금 사람들은 언론개혁조차 관심 밖일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교육개혁은 교실파괴를 만들었다는 한탄도 들린다. 개혁의 결과, 우리는 더 가난해졌고, 더 험악해지고 말았다.
80년 초 방송계는 온통 검은 빛이었다. 희망의 2000년대 초-신문은 말 그대로 ‘암흑기’를 맞고 있다. 프로이트는 바로 그 암흑적 요소를 ‘타나토스’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삶의 의지인 성욕뿐만 아니라 죽음의 본능, 즉 자멸의 길을 선택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지금(!)의 ‘언론개혁’의 본질은 무엇인가? 충동적 권력에 의한 ‘타나토스-자멸의 선택’이다. 신문이 죽는다면 언론개혁을 충동적으로 추진하는 정부도 함께 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힘에 대한 두려움’만을 기억할 것이다.
전여옥(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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