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서는 ‘love’가 그리스어의 ‘아가페’와 ‘에로스’를 아우르는 단어가 되어서 일찍부터 교회에서 ‘love’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들어서 ‘love’가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게다가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love’나 ‘aimer’나 ‘lieben’ 같은 단어를 사람뿐만 아니라 물체나 개념에도 사용해서 더욱 발설하기 쉬운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진지한 문학을 읽어보면 아직도 서양인에게도 ‘I love you’가 누구에게나 술술 나오는 말은 아니고 그 때문에 생기는 고민과 오해, 불행도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30∼40년 사이에 어찌나 많이 변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요새는 ‘사랑한다’란 말이 ‘밥 먹었니’만큼이나 일상적인 말이 돼버린 것 같다. 내가 퇴근길에 즐겨 듣는 한 라디오 프로에서는 옛날에 받았던 연애편지 같은 것을 보내 온 부부들을 전화로 연결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행자들은 부부에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면 그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오지 않아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좀 쑥스러워하면서도 용기를 내서 하고, 개중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올 뿐만 아니라 더 진한 표현까지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바야흐로 ‘사랑’이 넘치는 시대가 된 것 같은데, 정말 사랑의 양이 증가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져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 진 것은 아닐까.
며칠 전에 어떤 판사가 가출 소녀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성을 제공받은 남성에게 ‘돈을 주지 않았으므로 청소년성매매에 해당되지 않고 미성년자와도 사랑을 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 판사님에게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처음 본 소녀와 성관계를 맺고, 그 소녀는 잠자리를 얻기 위해서 계속 남자들에게 성을 제공해야 하는 본래의 처지로 복귀시켜 준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판사는 무죄판결을 하기 전에 그 남성이 하룻밤 ‘사랑’한 소녀가 임신 등 신체적 후유증이 생길 경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연락처라도 알려 주었는지 확인을 했는가.
몇 해 전에 어느 마을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 소녀가장이 그 마을의 10대부터 70대 남성까지 수십명에게 성을 제공한 사건이 드러나 보도됐다. 그 소녀는 일찍이 자신이 가장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이 수치심 없는 남성들에게 성을 제공하는 길이라는 것을 발견한, 우리 사회의 비정한 성문화의 희생자이다. 이 판사의 논리대로라면 성을 제공받은 대가로 그 소녀의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남성은 유죄가 되고 그 소녀를 성적으로 이용만 한 철면피는 ‘사랑’을 한 것이므로 무죄가 되지 않겠는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도 개인에 따라서 의식은 수세기의 차이가 날 수 있다. 인터넷 채팅에서 성적인 욕설을 대하고서 자살한 여중생이 있는가 하면 밤마다 상대를 물색하는 ‘노련한’ 10대도 있다. 법은 평균치보다 자기 보호능력이 좀 적은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는가.
미국에서는 14세 이하의 미성년과의 성관계를 맺은 어른은, 상대편의 분명한 동의가 있었더라도 무조건 처벌받는다. 그래서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13세 소녀와의 성관계 전력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 영국 등 유럽국가들의 청소년과의 성관계 금지 연령은 만 16세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13세라고 하는데 이는 정말 국가의 책임유기이다. 최소한 만 16세이어야 하고 고등학교 졸업연령인 만 17세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법연수원 과정에 국어과목을 신설하고, 여성학 강좌를 포함시키면 이렇게 ‘사랑’을 모독하고 성적 방종을 조장하는 판결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가 인신매매 3등국의 불명예를 벗고 어린 소녀들을 성의 함정에서 보호하는 데 사법부의 협조를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서지문(고려대교수·영문학·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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