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김명자씨 '토지문화관'에서의 환경대담

  • 입력 2001년 7월 23일 19시 06분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왼쪽)씨는 20여년간 손수 텃밭을 일구며 자연 속에 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환경사랑은 고작 땅을 보듬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한 이래 꾸준히 환경토론회를 개최해 왔다. 박씨와 김명자(金明子) 환경부장관이 20일 그의 거처인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만났다.<편집자>》

▽박경리씨〓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경정책을 책임지면서 어려운 점이 많겠지요. 요새 일어나고 있는 환경 파괴행위들을 보면 가슴이 탁탁 막혀요. 정부가 좀더 힘을 써야 합니다.

▽김 장관〓물론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십년 동안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장관으로 일하면서 환경행정이 사후처리 위주라는 점이 답답했습니다. 점차 사전예방으로 옮겨 가는 것이 바람직하고 개발 담당부처도 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환경이란 풍월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절실한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식수와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면 곧바로 위락시설이 생기고 관광지로 변하는 현실입니다. 먹는 일보다 노는 일이 앞서가는 형국이지요.

▽김〓무분별한 소비는 20세기 ‘고도산업사회’ 이후 기술 위주의 사회로 바뀌면서 기술이 인간의 가치를 앞지르고 있는 현상이지요. 멀쩡한 물건들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정부는 그것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썩힙니다.

▽박〓지식인들이 새로운 이념을 세워야 합니다. 소비의 폐단은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사회주의도 동구권의 예에서 보듯 자본주의 이상의 환경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두 체제가 모두 ‘물질’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저는 새로운 ‘정신’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우리 밑바닥에 흐르는 동양사상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무속(巫俗)신앙의 근원은 생명숭배입니다.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고 자연에서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지요. 또 산이나 강에 음식을 던지는 ‘고수레’ 풍습은 동물에게도 밥을 주며 같이 살자는 의미입니다. 환경문제는 곧 ‘다른 동식물에게 위기가 오면 인간에게도 위기가 닥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인 만큼 우리 사상이 선구적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김〓동감입니다. 물질 위주의 발전이 낳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정부는 선진국의 이런저런 제도들을 다각도로 받아들여 시행했지만 성과는 미흡했습니다. 환경부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국민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근본적 문제로 지적하고 싶습니다.

▽박〓실천이 뒤따라야죠. 저는 매일 산에 올라 흙 속에 파묻힌 비닐들을 뽑아냅니다. 비닐에 덮여있던 흙이 메말라 죽어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어져요. 많은 사람들이 복을 비느라 산제(山祭)를 지냅니다. 그보다 비닐 한 장 뽑아주는 것을 산은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또 정부가 휴식년제를 지정해 산을 쉬게 해주는 것처럼 자연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김〓환경부는 자연 보존을 위해 각종 규제를 가합니다. 하지만 땅값이 떨어진다며 지역사회의 반발이 대단해요. 효과적인 규제가 이루어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역주민에게 줘야 하는데 환경부는 그 기능이 없어요. ‘보존을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모델이 없는 것이 환경행정의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또 환경은 지구적 문제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미국측은 올 5월 지구온난화 현상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기후변화협약을 거부한다며 “부엌에서 연기가 난다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느냐”고 주장했어요. 이에 유럽측은 “연기가 나고 있는데 어떤 소화기가 좋은지를 토론하고 있겠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바닷물 수온이 올라가고 있어요. 더운 물에 사는 멸치는 늘어나고 찬물에 사는 대구와 명태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무의 식생이 바뀌고 말라리아 환자가 늘고 있는 것도 기온 상승 때문입니다.

▽박〓무서운 일입니다. 원주에도 작년에 백일홍이 피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기온이 올라간 탓이로군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현실화되고 있다면 작가의 지나친 상상력일까요?미국측의 이야기는 궤변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욕심이지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 파괴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당장 별 도리가 없지 않나”라며 고개를 돌립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김〓맞습니다. 환경 보존은 미래세대를 위한 것입니다. 환경정책의 지표인 ‘지속 가능한 발전’은 성장과 보존의 평형을 이뤄 미래를 보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연의 복원능력 내에서 자원을 퍼쓰고, 미래세대에게 남겨줄 몫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이를 위해서는 댐을 짓고 간척을 하는 등 ‘모자라면 만들겠다’는 공급위주 정책에서 탈피해 이미 있는 것을 알뜰히 쓰는 수요관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박〓미래세대를 생각하며 서울의 청계천을 떠올렸습니다. 인왕산과 남산 사이의 서울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이 지금은 ‘거대한 쓰레기통’이죠. 광교를 비롯한 옛 문화재들을 무참히 덮어버린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맑은 물을 흐르게 한다면 얼마나 후손을 위해 값진 일일까요. 낡은 상가도 고급 쇼핑가로 정비하고 하천변에 산책로를 만든다면 서울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도심 속의 문화와 환경을 함께 살리는 일이지요. 비무장지대(DMZ)도 10여개국 군대가 이데올로기 싸움을 벌였던 냉전의 상징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두면서 ‘야생 동식물의 천국’으로 만든다면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김〓청계천 복원은 이상적인데 현재의 국민의식 수준에서 결단이 가능할지…. 예전에는 범람을 방지한다며 도심의 하천변 등을 시멘트로 발라버렸지만 빗물이 땅에 흡수되지 못해 오히려 범람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하천 옆에 풀과 나무를 심고 물줄기도 구불구불하게 놓아두는 ‘자연형 하천’이 선호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양재천이 그런 모습으로 바뀌어 다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살아나고 있어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비무장지대를 접경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할 예정이고 경의선 철도와 남북연결도로도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건설할 것입니다.

▽박〓모쪼록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제 할 일을 못한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은 급해지고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습니다. 장관님께서 환경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주세요.

▽김〓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박선생님과 처음 만났는데도 이렇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모아갈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습니다.

<정리〓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약력/박경리▼

△1926년 경남 충무

△진주여고

△55년 단편 ‘계산’으로 등단

△69년 ‘토지’ 연재 시작

△94년 ‘토지’ 1∼5부 집필 완료

△96년 토지문화재단 창립

△대표작 ‘토지’ ‘김약국의 딸들’

‘표류도’ ‘시장과 전쟁’ ‘거리의 악사’(수필집)

△월탄문학상, 인촌상, 보관문화훈 장, 호암상

▼약력/김명자▼

△1944년 서울

△서울대 화학과, 미국 버지니아대 박사(화학)

△숙명여대 교수

△과학사학회 부회장

△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

△99년 환경부 장관

△저서 ‘근대사회와 과학’ ‘동서양 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 ‘엔트 로피, 변혁의 시대 어떻게 살 것 인가’

△과학기술상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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