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1번(서울-목포)을 타고 전북 김제를 들어서면 원평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끝자락에 학수대(鶴壽臺)라는 누정(樓亭)이 있다. 마당에는 동학군을 지휘한 금구 접주로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혁명 오걸(五傑)로 꼽히는 김덕명 장군의 추모비가 있다. 비석 바로 너머에는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나오고 그 가운데 띄엄띄엄 무덤이 보인다. 이 무덤들은 갑오혁명 당시에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동학농민군의 무연고 묘지이다.
암울한 제국주의 시대에 옥창 너머 푸른 하늘에 영광된 조국의 미래를 그리던 애국 선열은 자신의 영예나 자식들의 부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호국 전선에 일신을 바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은 가난하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이 시대의 낙오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책임지고 보듬어야 할 문제이다. 복지 국가로 가는 정책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애국 지사의 유족들이 음습한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방기(放棄)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좋아져 다소의 포상금을 받고 애국지사로 추서된 분의 후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순국 선열의 후손으로서 아직도 소외 받고 아무런 영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1894년 갑오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일 것이다. 서훈이나 연금은 커녕 묘소도 없이 멸문의 화를 당한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긍지를 느끼지도 못한 채 당장의 삶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들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데 왜 동학농민군들은 아직도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고 있는가? 그것은 ‘독립운동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해석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법에는 순국 선열의 범위가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해석이다.
갑오혁명 이듬해인 1895년의 을미의병에 참여한 유인석 안병찬 이강년 허위 등은 애국지사이고 을미의병의 중요한 뿌리를 이루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순국선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1년 앞서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살육도 국권 침탈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서훈의 신청은 유족만이 할 수 있다(동법 3조 1항). 그러나 그 후손 중에 서훈 신청서를 작성할 의지와 학식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즉 정부가 나서서 특별법을 제정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들의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정읍, 고창, 삼례, 공주 등지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지역에 대한 유적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국립4·19묘지 규정’이나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추서할 경우에 발생하는 재정을 걱정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법률’에 따르면 금전적 수혜자는 손자 대에서 그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백여년 전의 일이어서 손자가 살아 있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문제는 명예 회복이다. 그들은 ‘동학란 수괴’의 자식이 아니라 순국선열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유림이나 기독교계의 정서를 탓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행적이 독립운동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학계가 합의한 사항인데 정부는 무엇을 더 망설이는가?
신복룡 (건국대 교수·한국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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