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개가 놀자고 앞발을 올리는 동작이 고양이에게는 공격의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개가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꼬리를 세우고 흔드는 게 고양이에겐 위협의 신호라는 것이다. 또 개는 귀를 뒤로 젖혀서 복종의 뜻을 나타내지만 고양이는 공격할 때 그런 자세를 취한다고 하니,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서로 반대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개와 고양이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나 교감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극단적 대립 정치권이 조장▼
영화 ‘캣츠 앤 독스’는 개와 고양이의 해묵은 오해가 의사소통의 문제라기보다는 누가 인간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가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 때문이라는 해석을 보여준다. 페르시아 고양이 팅클은 개 알레르기 제거제 연구를 어떻게든 저지하고 그것을 역이용해 고양이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 적자생존의 싸움에 동원되는 온갖 전술과 첨단의 무기는 인간의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초현대적이다. 이 허황한 코미디를 보고 나오면서 뒷맛이 씁쓸했던 것도, ‘고양이 자유수호선봉대(FLF)’와 ‘개 비밀동맹(CIS)’의 싸움이 왠지 다양한 이해관계와 주도권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싸움을 희화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연일 언론을 장식하는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대화 가능성마저 잃어버린 채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언론개혁 문제나 방북단 파문만 해도 해결의 기미는 없이 대립의 골만 점점 깊어가는 듯하다. 또, 그런 분열과 대립이 정치권에 의해 오히려 조장되고 악용되면서 실제보다 더 증폭돼 나타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치나 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문학의 논쟁에 있어서도 그 첨예한 관심은 예의 문학작품보다는 권력의 분배와 향방에 쏠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물론 부당하거나 안이한 권력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그런 논의의 진통 없이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수혈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논의의 태도가 너무나 단선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공동선에 이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단순히 넘기기에는 논의의 초점을 벗어난 인신공격과 일방적인 매도가 너무나 많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무기의 선명도만 높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그를 중재하는 목소리나 방법적 회의를 표명하는 사람들까지도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신중한 태도는 이제 무능하고 비겁한 처세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게 됐다. 아마도 침묵하는 다수가 지닌 고민은 그 양극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초월할 수도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 대답을, 아니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너는 개편이냐, 고양이편이냐. 그 선택은 갈수록 윤리적이라기보다는 한결 정치적인 성격을 띠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의 기본 예의부터 찾아야▼
오히려 정치의 시대라고 불리던 80년대에 우리의 선택은 크건 작건 윤리적인 고민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현실의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도덕적 힘이 자산일 수 있었고, 열띤 논쟁을 통해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합의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지나간 연대에 대한 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공격적이고 소비적인 혼란에 비추어서는 그렇다.
그에 비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은 참으로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다. 이렇게 크고 높은 목소리들만이 득세하게 된 데에는 지식인의 침묵이 주범이라고 하지만, 그 침묵을 만들어낸 풍토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화의 기본적인 방식이나 예의조차 잃어버린 사회, 그것이 서로를 개와 고양이로 나누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개와 고양이의 싸움을 구경하면서는 웃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 진저리나는 싸움판에서는 누구도 관람객일 수 없다. 참담한 침묵조차도 그 싸움에 관여하고 있는 일종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나 희 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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