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는 자기의 몸이 악기이므로 자기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인격 자체가 치료의 도구이니 첫 환자는 바로 자신이어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것이 강제조항은 아니었지만 나는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잃어버린 진짜마음을 찾아서▼
일주일에 두 번, 스승의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가 되었다. 한 번에 50분씩 걸리는 정신분석 치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 2년간 지속했다. 200여회, 160여시간 동안 오로지 나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셈이니, 내 마음의 병도 만만찮게 깊었던 모양이다.
내가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던 진료실의 풍경은 좀 묘하다. 나와 내 스승이기도 한 정신분석의는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채 50분의 시간을 보낸다. 환자인 나는 침대같은 긴 의자에 눕고 내 머리맡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정신분석의가 앉는다. 2년 동안 내 주치의가 어떤 포즈로 앉아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런 별스러운 자리 배치도 정신분석 치료의 고전적인 원칙 중 하나다. 가능한 한 시야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을 때 환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느낌이나 생각이 가감없이 그대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의사의 표정을 보니 내 말을 듣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혹은 ‘저 의사는 내 말이 지루한가봐’ 등의 생각들이 환자 자신의 자유연상을 방해할 수도 있고, 때로는 방안에 있는 현실적인 물건 자체 때문에 무의식으로의 깊은 침잠이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 탓인지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늘 일정한 ‘심리적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치료를 받던 당시의 나는 왜 그렇게도 열등감이 많았는지, 또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왜 그렇게 지겹도록 따라붙어서 떼어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건지…, 절망스러웠다.
어느날인가에는 차라리 내가 정신병동에 입원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서 시간마다 주는 밥을 받아먹고 때되면 누가 와서 내 얘기도 들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의사의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환자적 본능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정했던 경험, 그것은 내가 깨달은 모든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또 그것이 지금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가장 근원적 에너지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정신과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는 호기심어린 질문을 받는 적이 많다. 그렇게 묻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생각, ‘나와 환자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신과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여러 증후들, 이를테면 두통이나 불면증 또는 신경성 위장장애 등의 신체적 증상 때문에 오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들을 포함해 정신과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다보니 잃어버린 자신의 진짜 마음을 찾고자 온다.
▼"이 가을, 환자로 돌아가고 싶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아는 것, 즉 ‘자기인식’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드러내면서 살기보다는 억제하고 사는 것이 미덕인 곳, 모난 돌이 먼저 정을 맞는다는 위협(?)의 땅에서 살았다. 그런 위협 속에서 부드러운 속살은 숨어버렸다.
이제는 원래의 내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신념은 과연 참(眞)일까.
나는 요즘 내 스승의 진료실에서 다시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환자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흔들림’을 강요하는 계절의 정취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공이 형편없는 정신과 의사인 때문인가. 시월의 마지막날, 아직도 자기인식이 힘겨운 한 정신과 의사의 가을 단상이다.
정 혜 신(정신과 전문의·정신과 전문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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