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그들만의 천국’이 아니다

  • 입력 2001년 11월 20일 18시 39분


우리 집 뒷산 약수터에는 물이 두 군데서 나온다. 물줄기가 하나는 굵고, 다른 하나는 가늘다. 줄지어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연히 굵은 쪽을 차지하고 싶어한다. 물통이 금세 차는 것을 보노라면 역시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비해 다른 쪽은 적지 않게 답답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기는 하나, 기다리면 이쪽도 언젠가는 물이 채워지는 것이다. 비록 내 물줄기가 가늘다 하더라도 참고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 이 약수터에 올 때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접할 것을 주장하던 플라톤의 말이 생각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생각 밖으로 민주주의가 만개했던 모양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등이 너무 지나쳤던지 플라톤은 자식이 부모와, 아이가 어른과 같이 행세하려 한다고 꼬집었다. 이러다가는 동물조차 사람과 맞먹자고 할 판이라고 야유를 보냈다. 그래서 그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사람의 값에 따라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비례적 평등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능력 펼칠 기회 불평등▼

옳은 말이다. 사람마다 다르게 태어나고 사는 모양도 각양각색인데 붕어빵 찍듯이 일률적으로 대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것처럼 ‘하향 평준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마음껏 그 재능을 발휘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접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 있고, 이 전제 위에서 각자의 재능과 노력이 사람들을 다르게 만든다면, 이 정도의 차이는 수긍할 수 있다. 고려 신종 때 최충헌의 사노(私奴)였던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절규했다.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다수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자기 삶을 자기 식대로 살아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연이 따로 있고 엑스트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근대 사회의 특징으로 ‘분산된 불평등’을 지적한다. 옛날에는 집안이 좋으면 출세도 하고 명성도 얻으며 그에 상응하는 배우자도 맞을 수 있었다. 따라서 불평등이 누적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부조리가 해체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개천에서 용 나듯’ 할 수가 있다. 불평등이 엄존하기는 하나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근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대표적인 것이 대학입시이다.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간다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부모의 경제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지극 정성(이것을 줄이면 ‘극성’이 되는 것인가?)이 명문대를 가는 보증수표가 되었다. 소위 일류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그에 걸맞은 배우자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부모를 두었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니 전 근대적 신분사회가 되살아난 기분이다.

▼소중한 인생 당당하게 살자▼

이런 상황에서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라는 주장은 공허하기만 하다. 자칫 기존 기득권 계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세상은 ‘수능시험 상위 5%’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줄기가 가늘면 가는 대로 다 소중한 인생이다. 잘난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기준이라는 것이 대개는 알량하고 편협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 못 올 인생인데, 왜 그따위 기준에 억지로 자신을 맞춰가며 산단 말인가.

누구든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살 권리가 있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말의 뜻은 ‘다수에게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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