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김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역앞 대우재단빌딩 16층에 있는 사회과학원 이사장실을 찾았다.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는 김 이사장은 팔순은 넘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우선 그 동안 왜 그렇게 언론에 나오기를 꺼렸는지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언론을 통해 얘기해야 소용이 있어야지요. 신문에 글을 쓰든 인터뷰를 하든 일반독자나 젊은이들은 알아들어도 정작 나라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변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계속 실망하다 보니,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며 언론에다 얘기할 시간에 차라리 보람 있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최근까지도 관직을 맡아달라는 요구를 여러 차례 받으셨다지요. 관직 제의를 사양하셨던 것도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 때문이셨습니까?
“생일상을 따로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벼슬을 안 하겠다는 게 제 일생의 신조예요. 국무총리부터 제2건국추진위원장까지 이것저것 하라는 것도 많았지만 한 번도 안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다들 정치에 나서려 해요.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은 아직도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심해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습 때문이지요. 내 딴에는 그저 내 삶의 신조에 따라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써 왔을 뿐이에요.(회고록에는 국무총리를 비롯해 모두 12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생일상도 작년 여름 중국 베이징대에 갔을 때 그 학교에서 생일잔치를 열어 줘서 사양하지 못해 받은 것이 처음이었어요.”
-‘장정’ 제5권의 부제가 ‘다시 중국대륙으로’이더군요. 최근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의 경제발전이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런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20대 광복군 시절에 중국에 있다가 돌아와서 39년만인 1989년에 다시 중국으로 갔어요. 그 때만 해도 중국은 정말 형편없었어요. 그 후로 중국과의 학술교류에 70대를 다 바쳤습니다. 이제 중국은 정말 무섭게 발전하고 있고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일류 국가가 될 것은 분명해요. 13억이 넘는 인구에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히 강하지요. 그 나라의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제가 하는 일은 그런 중국과 한국의 학술교류를 통해 서로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지요.”
김 이사장은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직시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수 차례 강조했다. 다른 사람들이 중국에 눈을 돌리지 않을 때 김 이사장이 사회과학원을 만들어 중국과의 학술 문화교류에 앞장섰던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적 역사적 긴밀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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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비하면 북한의 변화는 너무 늦지 않은가 싶습니다.
“북한은 변한 게 없어요. 다만 북한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현실과 희망사항을 혼동하는 것이지요. 북한은 스스로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저 돈 될 일만 찾고 있어요. 그래서 남북관계는 낙관만 해서는 안 돼요. 북한이 변하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중국에 비해 북한에 대한 전망이 너무 비관적이신 게 아닌가요?
“중국도 마오쩌둥 시절에는 변화가 없었어요. 그때는 저도 중국을 많이 비판했었지요. 그런데 덩샤오핑 이후로 개방정책을 펴면서 중국은 크게 변화했어요. 이제는 계급투쟁도 없고 사유재산도 인정하지요. 정치 문제만 건드리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정도까지 와 있어요. 북한도 실제로 변하기만 한다면 저도 북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군요.”
-북한의 변화를 기대할 때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원해요. 인간의 기본권을 억눌러서는 오래 가지 못하지요. 중국도 북한도 모두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며칠 전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보세요. 탈레반 정권이 물러가자마자 남자들은 수염을 깎고 여자들은 차도르를 벗어던지고 거리로 나왔어요. 북한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지, 반드시 변하긴 변할 거예요. 만일 통일을 서둔다고 해서 ‘인권’ 문제를 덮어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에요. 통일도 자유와 평등과 인권 신장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해요.”
-중국이 다당제로 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중국의 정당제도 마찬가지지요. 사람들이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면 곧 자유의 억압에 맞서게 되는 것이지요. 중국의 경제적 성과를 보면 다당제 실시도 멀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긴 역사를 볼 때 역사는 변하게 돼 있지요.”
1920년 평북 강계에서 출생한 김 이사장은 일본 게이오(慶應)대 동양사학과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자 1944년 일본군을 탈출, 광복군에 가담했다. 광복 후에는 고려대 교수로 후학들에게 역사학을 가르쳤다. 고려대 총장으로 있던 1985년 반독재투쟁 주동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군사독재정권의 압력에 맞서 대항하다 총장에서 밀려났다.
-14년간에 걸쳐 회고록을 5권이나 펴내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텐데….
“후대를 위해 제가 겪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1, 2권 ‘나의 광복군시절’에서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일단을 조명해보고 싶었고, 3권 ‘나의 총장 시절’에서는 군사독재시대에 지식인과대학이어떤탄압을받았는가를 밝혔어요. 4권 ‘나의 무직 시절’에서는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과 ‘나는 좌절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서술했습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보실 때 최근의 테러전쟁을 문화충돌이라고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전쟁을 문화전쟁이라든가 종교전쟁으로 보면 안 됩니다. 테러는 테러 그 자체로 봐야지요. 북한이 미국과 맞선다면 그것을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로 봐야 되나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를 시켜 일본인들을 죽였을 때 그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테러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의거예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요. 이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험난한 현대사에서 도덕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 꼿꼿이 지조를 지키신 선생님을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해주시지요.
“긴 역사를 볼 때 자유 정의 선은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지요. 이 신념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마찬가지예요. 이런 신념 없이는 살아가기가 참 힘들지요. 그리고 나라를 잃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그 힘 중에는 경제력이나 군사력도 있지만 제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신의 힘이에요. 우리가 물질적 발전에 매달리면서 정신의 힘을 소홀히 해 왔고 저는 그 점을 계속 경계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정신적인 힘에만 매달릴 수 없는 시대가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요. 지금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을 해대는 것에 대해 말도 많지만, 미얀마에서 있었던 아웅산테러사건이나 대한항공 납치사건 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외교적으로 항의를 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일단 미국이 지금처럼 강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런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물리적인 힘을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물리적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요즘은 정신적인 힘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것이 중요해요. 정신의 힘을 모르고 물리적인 힘에 의존할 때 교만함이 나오는 것이죠.” 무작정 찾아간 기자와 어쩔 수 없이 인터뷰를 하게 된 김 이사장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를 붙잡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제자 같아서 이야기를 마구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신문에 교만하게 나오면 안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는 박한 법이지요. 저는 교만하게 살지 않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어요.”
<만난사람〓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