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바느질 상태가 꼼꼼히 되어 있는가를 점검하고 옷을 산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소비자들에게 있어 옷감과 바느질 상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여든에 다가선 나의 어머니의 옷을 선택하는 구매 기준은 첫째가 브랜드이고 둘째가 디자인이라고 한다. 브랜드는 제품 자체라기보다 그 옷을 만든 회사의 이미지와 신뢰를 담은 이야기이며 디자인이야말로 감성이고 문화다.
이제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물건을 사기보다 그 물건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와 문화를 산다. 시장이 이성의 힘에 의해서보다 이야기와 감성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소비자를 끄는 새로운 힘▼
과연 그럴까.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져봤다.
“경주에 가면 성덕대왕신종과 에밀레종이 유명하다. 어느 종을 먼저 보고 싶은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상당수의 학생들이 “에밀레종을 먼저 보고 싶다”고 답해왔다. “성덕대왕 신종은 나중에 보겠다”는 의견과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나왔다. “같은 종 아닌가요”라며 질문 속에 담겨있는 난센스를 밝혀낸 학생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똑같은 종이라도 종이라는 물건 이름(성덕대왕신종)을 사기보다 종의 이야기(에밀레종)를 사겠다고 나선 학생들의 태도다. 단순하게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변화의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이야기와 감성을 팔아야 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례는 이미 기업 광고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기업 자문에 응하고 있는 나의 눈에 비친 A전자와 B전자의 대형냉장고시장 판촉전은 꿈과 이야기, 감성이 시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소비자의 문화 코드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B사는 초기 텔레비전 광고에서 냉장고 앞에 양 한 마리 가져다 놓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계속 물건의 기능만 선전한다. A사는 기능에 대한 일체의 설명이 없이 여자 탤런트를 등장시켜 “남자들은 모른다. 주부가 갖고 싶은 꿈의 냉장고”라며 초지일관 꿈과 이야기를 판다. 결과는 초반부에 기능을 판 회사가 우세하다가 현재는 국내시장에서 꿈과 감성에 호소한 회사의 완전 우세로 역전됐다. 꿈과 감성과 이야기의 힘이 기술과 물건 중심의 선전을 버린 것이다.
시장이 완전히 이야기 감성시장으로 변했다는 증거는 이밖에도 도처에서 감지된다. 숲 그 자체가 상품이던 광릉수목원에 이야기를 담아 파는 숲 해설가가 등장하면서 관람객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경우나 삼성전자의 애니콜이 중국시장에서 한류 문화 스타의 이야기와 결합해 창출해낸 판매승수 효과는 기존의 이성과 합리주의의 경영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야기 시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관광시장까지 파고든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이야기가 정동진 관광 특수를 만들어낸 것이나 가을 동화의 촬영지가 감성지수 높은 외국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유인 요소가 된 사실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뿐인가. 냉장고 속의 달걀시장의 변화도 꿈과 이야기시장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정보-기술보다 강하다”▼
현대의 많은 소비자들은 이제 시장에서 밤새도록 백열전등을 켜놓고 뽑아낸 양계장 달걀보다 비싸지만 ‘수정란’, ‘자연란’이라는 이름의 달걀을 선호한다. 동물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비윤리적 생산 방식의 산물인 양계장 달걀보다 자연란 속에는 옛날 옛적의 잃어버린 시절의 꿈과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달걀 속에 담긴 이야기 값, 즉 꿈의 값에 사람들은 아낌없이 돈을 지불한다.
그런데 정말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시장 변화의 문화코드 속에 더 큰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단서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제 생산의 핵심 동력, 즉 세상의 가치 중심이 정보와 첨단기술에서 이야기와 감성, 문화로 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와 감성을 팔아라.” 다음 사회로의 변화를 읽는 자는 시장에서 승리하는 자가 된다.
홍사종(숙명여대 교수·문화관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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