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나희덕/산타클로스는 어디에…

  • 입력 2001년 12월 25일 18시 22분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 집의 두 아이가 주고받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열두 살인 맏이는 산타클로스가 올해도 분명히 올 거라고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오히려 일곱 살인 둘째는 그런 오빠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와, 아직도 산타클로스를 믿다니! 오빠는 나이를 헛먹은 거 아냐?”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둘째에게 “왜 작년에도 산타클로스가 우리 아파트에 왔잖아” 하고 물었더니, 그건 유치원 운전기사 아저씨가 변장한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해마다 머리맡에 놓여 있던 선물도 누가 놓아둔 것인지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조숙한 리얼리스트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맏이 역시 다 알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유년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보려는 마음에서 순진한 척하는 노련함을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업 불황… 우울한 성탄절▼

호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없다고 말한 교사가 아이들의 꿈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부모들도 아이들의 꿈과 신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잘못이 크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믿느냐를 기준으로 아이들의 동심을 판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산타클로스를 열렬히 믿고 싶어하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대목을 노리는 상인들인지도 모른다.

올해도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해리포터 게임기를, 푸에르 인형을, 햄토리 하우스를, 디디아르 펌프를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는 ‘좀더 나이 든 아이들’에게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듯하다. 올해 대학 졸업생 4명 중 3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통계를 보면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산타클로스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기업도 정부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 실업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일자리도 경력사원 위주로 뽑는다고 하니, 새로운 인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수십 번씩 이력서를 쓰고도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한 채 막막한 밤하늘만 바라보았을 그들의 성탄절은 여느 해보다도 우울했을 것이다.

또한 보육원이나 양로원에도 온정의 손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보육원 총무로 일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주로 사회복지시설에서 보냈다. 그 시절에는 명절 때가 되면 하루에도 몇 팀씩 떡과 과일, 내복 등을 가지고 찾아와서 추운 마당에 나가 기념사진 찍는 게 귀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광고를 하면서라도 사회의 응달을 찾아가는 사람들마저 없다고 하니, 이래저래 모두가 제 앞가림하기도 힘든가 보다.

이렇게 다른 해보다 성탄절의 열기가 많이 가라앉아 보였던 것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침체를 반영하는 현상처럼 느껴진다. 거리의 장식들도 그리 요란하지 않고 백화점의 인파도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도 9·11테러 이후 쇼핑 열기 대신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조용히 성탄을 맞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바탕의 소비적 축제로 끝나는 것보다는 한결 성숙된 모습이라고 여겨지지만, 우리 마음의 여유까지 얼어붙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서로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마저 얼어 붙어서야▼

누군가의 계산에 따르면 세계에서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이는 1억60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산타클로스가 실제 있어서 이 모든 집에 다녀가려면 한 가정에 머무는 시간은 0.0007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특히 한국처럼 주차난이 심각한 나라에서는 산타클로스의 운행도 훨씬 지연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올해도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대를 깨지 않으려고 부모들이 알아서 ‘숨은 산타’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아이들만의 산타클로스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아이들의 산타가 될 수는 없을까. 또한 산타를 기다리는 척하는 영리한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산타를 기다릴 수도 없는 좀 더 나이든 아이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을 들려줄 수는 없을까.

나희덕(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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