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 스포츠외교학과 오노균(吳盧均·48) 교수는 자신의 월급이 얼마인지 모른다. 대학교수가 된 4년 전부터 월급을 아예 조교에게 맡겨 제자들의 장학금으로 쓰도록 했기 때문이다.
매달 형편이 어려운 4, 5명의 학생이 오 교수의 월급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고 매 학기 1, 2명은 그의 월급에서 10%를 떼 내 적립한 기금에서 장학금을 받는다.
6급장애인이면서 대학교수로는 흔치 않은 구청 7급 공무원 출신인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통한다.
그가 ‘베푸는 삶’을 시작한 것은 힘겹게 공부해야 했던 자신의 인생과 청춘의 꿈을 접게 만든 불의의 사고 때문. 태권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는 향학열을 포기하지 않고 낮에는 태권도장 사범으로 일하고 밤에는 방송통신대학을 다녔다. 결국 고교 졸업 10년 만인 1985년 용인대 태권도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졸업을 한 해 앞둔 87년 전국체전에서 시합 도중 오른쪽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돼 한동안 좌절했지만 ‘이대로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명지대 야간대학원에 진학해 체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91년 대전 서구청 문화공보실 체육담당 7급 직원으로 취직했다.
월급을 받기 시작한 이후 그는 대전장애인연합에 매년 100만원씩 기부하는 등 본격적으로 장애인 돕기에 나섰다. 경로당과 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며 게이트볼시설 등 노인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설치하는 일도 시작했다.
그가 대학교수가 된 것은 98년. 2년간 휴직하고 미국 웨스턴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우연한 기회에 충청대에 태권도를 특화로 하는 학과를 만들자고 제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체육학부 조교수로 초빙됐다.
“지난 20년 동안 집에 월급을 갖다 준 적이 몇 번 되지 않아요. 월급은 제 돈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죠. 그 동안 불평 한마디 안하고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내조해 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는 현재 월급 전액을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는 한편 전공을 살려 일주일에 두 번씩 경로당과 양로원 등을 찾아가 노인들에게 무료 건강강의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200여명, 충청지역 경로당과 양로원에서 강의한 횟수만도 400회가 넘는다. 앞으로 그의 희망은 봉사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한 베풀며 사는 것.
“온갖 정성을 쏟아 가르친 학생들이 기반을 잡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저로 인해 기뻐하는 학생과 노인들을 볼 때면 다시 힘이 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희망이지요….”
이훈기자 dreamla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