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타계한 ‘생의 한가운데’ 작가 獨 루이제 린저

  • 입력 2002년 3월 19일 19시 01분


1980년 북한을 방문한 루이제 린저(오른쪽)가 김일성 주석(왼쪽)과 환담하고 있다
1980년 북한을 방문한 루이제 린저(오른쪽)가 김일성 주석(왼쪽)과 환담하고 있다
17일 91세로 사망한 ‘생의 한가운데’의 작가 루이제 린저는 남북한을 아우른 한반도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AP통신 등 외신들도 ‘북한의 전 지도자 김일성 예찬자’로서 그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린저씨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남편인 ‘카르미나 부라나’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를 통해 당시 독일에서 활동중이던 작곡가 윤이상씨를 알게 되면서부터. 윤이상씨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납치되면서 그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나치시대에 체험한 공포정치와 겹쳐지게 됐다.

▼작곡가 윤이상과 친분▼

1975년 10월 당시 문학사상사 이어령 주간(전 문화부 장관) 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으나 27일간의 여정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초 예정된 통역자가 각각 ‘정보기관과 연계돼 있다’ ‘좌익분자다’는 의심을 받아 두 차례나 교체됐던 것. 갑작스레 통역을 맡게 된 전영애씨(현 서울대 독문과 교수)는 “방한 기간 내내 린저는 불안에 사로잡힌 모습이었고 나를 ‘딸’이라 부르며 의지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식깨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자신을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와 동일시할 정도로 이작품은 인기를 끌었다. ‘생의 한가운데’가 그의 사전 동의없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사실도 그를 불쾌하게 했다. 린저는 한국의 풍광과 팬들의 열성에 매료됐지만 여러 예기치 않은 상황과 마주쳐야만 했다. 일부 재야 인사들이 한밤중에 그를 ‘납치하듯’ 데려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전영애 교수는 “가까이서 본 린저는 세심하면서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이었다. 우연한 일정 변경까지도 의심을 갖게 됐으며 점점 의심이 커져갔다”고 말했다.

그와 한국의 관계는 6개월 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그의 방한 회상기가 연재되면서 파국을 맞았다. 뒤에 슈피겔에 반박문을 게재한 이어령씨는 “린저는 한국을 정보기관의 감시가 판치는 억압국가로 묘사했으며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마저 한국 정부의 조작극이라고 썼다”고 회상했다.

1980년 당시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땅을 밟은 린저는 ‘지상낙원’이라는 북한당국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방북후 출간된 수기 ‘또 하나의 조국’에서 그는 김일성을 ‘평화밖에 염두에 두지 않는 지도자’로 묘사하며 ‘환영회장에 내 이름이 Ruise Linser가 아닌 Luise Rinser로 옳게 쓰여 있더라’며 감동할 정도였다. 김일성 주석과 각별한 친분을 맺게 된 그는 이후에도 국제정치 현안에 대해 김일성에게 수시로 편지와 전화를 보내는 등 ‘북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서구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0여개 출판사서 번역출간▼

이런 현실과 대조적으로 북한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없었던 대표작 ‘생의 한가운데’는 한국에서 10여개가 넘는 출판사에 의해 번역돼 나왔다. 1967년 ‘생의 한가운데’를 처음 펴낸 문예출판사의 전병석 사장은 “문예출판사만 지금까지 어림잡아 40만부가량을 판매한 것으로 추산되며, 다른 출판사의 번역분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학사상사는 그가 방한을 앞두고 이 잡지에 기고한 ‘한국의 니나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다음달 발간되는 4월호에 재수록할 예정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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