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6월 13일)와 대통령선거(12월 19일)의 양상을 보면 몇 가지 가닥이 잡힌다. 우선 마구 퍼붓는 상대방 공격이다. 세금과 건강보험료를 제대로 냈니 안 냈니, 품위 없는 말을 네가 먼저 했니 안 했니 하는 것들이다. 목청을 돋우는 몇몇 후보를 보면 밤무대 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들의 단 하나 목적은 ‘저 사람은 꼭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니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서민정책의 盧와 實▼
월드컵축구의 짜릿한 드라마에 쏠리는 관심을 돌려 볼 양으로 비방전에 힘을 쏟는 모습이지만 얼마나 소용 있겠는가. 더욱이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운동이 뒤엉켜 돌아가는 바람에 더욱 혼탁하다. 험담 수준을 훨씬 넘는 말들이 쏟아지면서 ‘막말정치’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번 선거의 볼썽사나운 특징이다. 선관위에서 적발한 위반 사례만도 하루 100건꼴로 벌써 5800여건에 이를 정도니 민주주의를 한다며 한국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너무 크다.
선거판의 또 다른 가닥은 어느 정파나 후보를 막론하고 개구일성(開口一聲) 거론하는 ‘서민정책’이다. 이런 발상에서 후보마다 자랄 때 어려웠던 시절을 시시콜콜히 소개하고, 서민과 가까워지겠다는 일념에서 예전엔 볼 수 없던 언동을 연출하는 것을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50대, 60대 치고 예전에 잘살았던 사람 있었는가. 나라살림 전체가 어려웠던 긴 세월, 책보자기 허리에 두른 채 검정 고무신 신고 학교 가던 모두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지만 자랑거리도 아니다. 애당초 내세울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서민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뒤집어서 말하면 서민이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통상 한국사회의 지도층을 추산할 때 상위 5%를 꼽고, 좀더 범위를 좁혀 상위 2%를 핵심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 중 핵심층 2%는 정치판에서 추정하고 있는 대략 30만명 정도의 여론지도층과 비슷한 수다. 각 정파가 내세우는 서민정책 대상에서 이들은 일단 제외된다고 보자. 그렇다면 서민정책이 겨냥하는 목표는 생활보호대상자인가. 행정기관에 등록된 극빈층 생활보호대상자는 전국에 70만가구, 150여만명이다. 현재 전국 유권자는 3400여만명 선이다. 한 표라도 소중한 선거에서 누구는 빼고 누구에게만 집중한다는 것은 현명한 득표전략이 아니다. 결국 ‘서민’이란 국민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따라서 서민정책의 대상은 국민이고 유권자인 셈이다. 더욱이 선거철엔 모든 유권자가 자신을 서민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보면 서민정책이란 뾰족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생활을 더 편안하게 하겠다는 득표전략의 한가지 구호일 뿐이다. 따라서 서민이란 당의정(糖衣錠)으로 포장된 정책구호에 그렇게 감동받을 일도 없고 서민 행세하는 후보들에게 딱히 감격할 필요도 없다.
이 자리에서 서민이 누구고 서민정책이 어떠하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민을 보고 대하는 정치인들의 몸가짐에 한마디하고 싶다. 서민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온유하고, 그리고 소박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민은 또 한편 솔직하고 열렬하고 준엄하고, 그리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서민의 강한 자존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서민의 자존심을 밟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의 아들들까지 연루된 권력부패와 정권비리다. 권력층 어느 누구보다, 정치권 어느 누구보다 권력의 부패로 나라의 품격이 안팎에서 떨어질 때 속상해하고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서민이다. 그 소리 없는 분노를 과연 아는가. 또 서민이 막말정치에 얼마나 실망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거친 말을 하는 것이 서민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자존심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는 서민의 가치가 품격이다.
▼권력부패에 짓밟힌 자존심▼
어느 주부독자가 보내 온 e메일은 그래서 폐부를 찌른다. “나라의 품격이 떨어짐에 자존심 상한 사람들 많습니다. 돈 없는 서민들도 품격은 있습니다. 품격 없는 돈보다는 최소한 가치를 유지하며 사는 서민들 많아요. 그리고 자꾸 서민들이 자기들 편이라고 평가절하시키지 말라고 하세요.” 한 서민의 조용하지만 엄숙한 소리다. 월드컵 승리의 환호는 자존심을 살려야 한다는 외침이다. 그것이 민심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