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왜 멀리서 찾으려는가

  • 입력 2002년 8월 23일 18시 22분


‘근로자들은 일을 하는 척한다. 정부는 돈을 주는 척한다.’

구 소련에서 유행하던 이 짧은 농담은 빈곤이 악순환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북한에서 경제개혁 소식이 간단없이 들려오는 요즘 이 농담은 왜 그들이 변해야 하는지 그 속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절박한 상황에서 달리 방도가 없어 선택한 길을 놓고 배부른 외부인들이 평가니 분석이니 하면서 진의를 의심하고 초장부터 실패를 예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한가하고 악의적인 훈수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변화 노력을 흡사 햇볕정책이 거둔 성과인 양 여론몰이에 안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리 정부도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는 매 한가지일 것이다.

냉전시대 대부분의 국가는 적에 의해 나라가 무너질 것을 가장 크게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화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국가의 몰락은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국제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이 중론이다. 세계화는 개방과 규제완화 그리고 민영화라는 경제규범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경제를 고집하는 것은 흡사 물갈퀴 신발을 신고 100m달리기에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 논리를 토대로 얘기하자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면적인 시장경제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배급제 범위를 줄이고 시장영역을 확대했다고 해서 북한이 택한 새 경제체제가 시장주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처럼 임금이나 물건값이, 시장이 아닌 정부에 의해 제한되고 통제되는 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발벗고 나서서 추진하는 경제개혁도 성공의 보장이 없는데 기존의 계획경제 틀 안에서 시늉만으로 해법을 찾는다면 그 결과는 낙관적일 수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는 “경제혁명은 체제 내의 혼란이 성숙해 있고 그것이 체제 운영자의 권력에 의해 억압될 수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지금이 그 시기인지도 의문이다.

집세가 20배 이상 오르고 쌀값이 550배나 인상되는 마당에 평균 18배 정도밖에 오르지 않은 급여로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지도 걱정이다. 그들은 공급되는 대로 모이를 먹던 ‘십자매’에서 끼니를 찾아 나서야 하는 ‘참새’가 된 입장이다. 문제는 먹이가 풍부하지 못한 상황이라 ‘야생 적응’이 그렇게 쉬울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생산성이 기록적으로 낮아 시장에 물산이 풍부할 수 없는 게 북한의 현실이라면 새 제도로 인한 경제적 혼란 역시 기록적으로 클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 ‘질병’은 한번 걸리면 치료가 보통 어렵지 않아 올바른 정책만이 확실한 예방책이라고 하는데 북한은 태생적으로 예방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환경 때문에 중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득권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어떤 기득권도 조용히 자리를 내놓고 떠난 경우가 없다는 점은 혼란이 집단적 혼돈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때 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하는 게 상책’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북한의 경제개혁은 서두를수록 유익하다. 그들이 같은 동포라는 동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제붕괴가 남한에 미칠 현실적 영향을 고려해서라도 북녘의 경제개혁은 격려되는 것이 옳다. 지구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역사적 사건은 그래서 우리에게 단순한 감상의 대상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즈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경제를 배우러 간다’는 보도에는 말문이 막힌다. 공부 잘하는 우등생을 찾아가 배워도 시원찮을 판에 한국에서 빌려간 경협차관도 못 갚을 정도로 경제에 실패한 나라에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말인가. 북한은 왜 그렇게 멀리 돌아가려는가. 세계에서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고 믿을 수 있는 동족이자 세계 각국이 칭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성공 사례 남한을 곁에 놓아두고 어디를 나다니는가. 아시아경기대회는 얼마나 좋은 명분인가.

북한의 경제개혁에 남한은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 이웃에 합의한 약속도 안 지키고 포탄이나 쏴대서야 어떻게 남쪽 국민의 환심을 살 수 있겠는가. 북한은 민심이 떠난 남한 정권에 기대어 쌀 몇 t 얻어 가는 것보다 진정으로 남녘 동포들의 마음을 얻는 노력부터 하는 것이 유리하다. 북한의 경제위기는 왜 그들이 남한의 우호정책에 대해 상호주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고 있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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