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세일/국익 팽개친 국가권력

  • 입력 2002년 10월 8일 18시 49분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 기강이란 예부터 나라의 명맥(命脈)이라고 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기본이 기강에서 온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대들고 노인들이 청소년들에게 봉변당하고 ‘조폭’들이 날뛰며 이익집단들의 과격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의도적이고 습관적인 거짓말이다. 도대체 국민을 어떻게 보기에 입만 열면 거짓말 행진인가. 남북문제가 어떤 문제인데 거액의 뒷거래와 정보보고의 축소은폐가 있을 수 있는가. 국회가 어떤 곳인데 테이프 조작이 가능하고 근거 없는 폭로가 난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룬 민주화인데 아직도 도청과 공작과 표적수사가 남아 있는가.

▼私益만 좇아 이전투구 일쑤▼

이제는 더 이상 정치지도자들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정치도 아니고 국가운영도 아니다. 국익은 팽개치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소수 권력집단들의 이전투구일 뿐이다. 위로는 최고 정치지도자로부터 아래로는 각종 이익집단들까지 모두가 사(私)를 좇고 공(公)을 업신여기는 철저한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지도자와 국민간에 최소한의 존경과 신뢰도 없는 무신(無信)의 시대가 되고 있다. 이래가지고서야 나라가 되겠는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나라 기강 해이의 근본원인은 국가권력의 사물화(私物化)와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에서 비롯되었다. 권력은 국리민복을 위한 수단인데 권력자체가 사익추구를 위한 자기목적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공사(公私)의 구별, 상하의 구별이 없어지고, 진실과 거짓의 구별, 합법과 불법의 구별도 없어지고 있다.

분명 다음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기강의 문제는 가치관과 이념의 혼란을 바로잡는 문제이기 때문에 형벌의 엄정함이나 권력의 위세만으로 잡을 수는 없다.

첫째, 우선 최고권력자가 사심(私心)을 없애고 철저히 공의(公義)와 국익을 우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율곡 이이 선생은 일찍이 군주가 사심이 없는 것이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근본(無私心 是立紀綱之本)이라고 하셨다. 권력은 천하백성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군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군주와 권신들의 사심이 기강과 국정혼란의 근본원인이었다.

둘째, 인사정책을 철저히 공명정대하게 해야 한다. 누가 보아도 인품이 출중하고 전문성이 뛰어난 인재들을 널리 찾아 윗자리에 앉혀야 한다. 사심이 많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국정운영의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은 곧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인사정책을 바르게 해 덕과 재능이 없는 자가 벼슬을 넘보는 일이 아예 없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도덕과 가치기준이 바로 서고 기강도 바로 선다. 인사의 혼란이 만병의 근원이다.

셋째, 국가정책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공론을 수렴해 정해야 한다. 정치적 공명심에서 국가정책을 정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가신(家臣)이나 공신 등과 같은 아마추어들에게 국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 또한 이익집단들의 주장이나 시중의 일시적 여론에 따라 국가정책을 정해서도 안 된다. 국가정책은 그 분야 학자나 전문가들의 오랜 토론과 연구결과를 수렴해 정해야 한다. 국가정책은 아마추어들의 부언(浮言)이나 무책임한 다수의 중론(衆論)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공론(公論)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 국정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회복되고 기강이 바로 서게 된다.

▼공정인사로 국가기강 세워야▼

넷째, 상벌을 엄정하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상은 공에 합당해야 하고, 벌은 죄에 합당해야 한다. 어진 자가 밀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며, 돈과 권력이 있으면 무죄이고 없으면 유죄가 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국가권력이 존중받고 나라기강이 서겠는가. 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경찰관 소방관 군인 과로로 순직한 공무원 등 진정한 애국자들이 홀대받는 사회에서 어떻게 국가관과 사회도덕이 바르게 서겠는가. 이 사회의 보상체계, 상벌체계를 근본적으로 광정(匡正)해야 한다.

사실 지금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한 시대이다. 국가혁명이 필요한데 개혁을 할 정치세력도, 정책세력도 없는 시대이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법경제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