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사라진 조직▼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한나라당 사람들 요즘 적진분열을 느긋하게 보고만 있을 때인가. 경쟁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대권은 당연히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면 ‘아니올시다’다.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격 아닌가. 안주심리에 빠져들어 어정쩡한 자세로 어떻게 대세론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건지 묻고 싶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을 놓고 터져 나온 ‘병풍’은 아직까지는 이번 대선의 가장 큰 분기점이었다. 그런데 병풍의 끝은 한나라당에 약도 주었지만 병도 주었다. 검찰 수사결과 발표로 병풍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한나라당은 단연 원기를 회복했고 분위기 역전에 나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잃었다. 병풍에 맞서 당내 결속을 지탱해온 긴장감이 사라진 것이다. 후보 부인의 ‘하늘이 두 쪽 나도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 당 대표의 ‘목포 앞바다에 던져버리자’는 발언도 따지고 보면 긴장이 풀리면서 나온 말 아닌가. 그뿐 아니다. 상임위별 예산안 심의에서는 이미 집권이라도 한 양 증액에 증액을 거듭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당내 일각에서는 집권 후 요직인선설까지 나도는 지경이니 벌써 김칫국 판이라도 벌이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각종 여론조사에서 30%대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 후보의 지지율 답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이 대세인가. 그나마 선두를 유지하는 것도 경쟁자들이 떨어뜨린 감을 주운 결과 아닌가.
문제는 ‘독창적인 결정 구(球)’가 없기 때문이다. 부문별로 많은 정책을 내놓았고 토론도 많이 했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겐 들리는 것도 없고, 머리에 남는 말도 없다. 덩치만 덜렁 컸지 유권자를 휘어잡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없다는 뜻이다. 요새 한나라당은 떨어진 이삭이나 줍는 모습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대선기류의 주도권은 역설적이지만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과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21’에 넘어가 있다. 이 시점에서 비판도 많이 받고 때론 욕도 먹지만 후보단일화만큼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이슈도 없다. 지금 대선정국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후보단일화론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이 중요한 시기에 관전자로 밀리면서 수세에 있는 형국이다. 정치는 역시 생물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움직이는 것을 쫓아가지 가만히 서 있는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법이다.
▼주도권 뺏기고 수세로▼
지금 후보단일화 문제에 명운을 건 정파들은 대단히 긴장해 있다.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반(反)이회창이다. 97년 대선 때도 투표일을 불과 한 달여 남기고 DJP, 그리고 박태준씨까지 합세하는 DJT 연합전선을 구축한 사람들이다. 김대중 정권은 그런 기막힌 연결고리를 이용해 이 후보를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했던 것 아닌가. 지금은 지리멸렬의 모습이지만 이들이 극적으로 후보단일화에 성공했을 때 대선정국에 미치는 반전의 충격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뿌리와 배경이 집권세력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단일화의 가능성은 살아 있다. 대선은 이제 결선 라운드에 들어섰고 앞으로 더욱 가파른 고비길이 한참 남아있다. 그런데 벌써 대세론 타령인가.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