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이오덕/닭은 제 새끼 아닌 것도 품건만…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39분


며칠 전 일이다. 벼를 벤다고 해서 한낮이 다 되어 나가 보았다. 10여년 전만 해도 온 식구가 나가서 일꾼들과 함께 낫으로 벼를 베고, 묶고, 나르고 하면서 점심은 논바닥에 둘러앉아 따스한 햇볕 아래 메뚜기가 톡톡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먹었는데, 요즘은 기계가 다 하니 벼를 거두는 논에는 기계를 부릴 사람 하나밖에 없다.

나는 큰아들 정우가 마치 이발사가 머리털을 깎는 것처럼 기계로 논바닥의 벼를 깎아 나가는 것을 높은 언덕에 앉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올해는 여름 중간부터 잇따라 비가 오고 구름이 하늘을 덮어, 가을에 단풍이 들 때까지 해가 난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추워져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 그래서 채 여물지도 못한 벼가 그대로 말라서 빛깔도 푸르죽죽하게 되었다.

▼개 준다고 병아리 삶는 사람들▼

날씨가 해마다 괴상하게 되어 가는데 이대로 가면 몇 해 뒤에는 어찌될까? 그런데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하늘 걱정을 하면 사람들은 ‘걱정도 팔자’라고 비웃는다. 사람의 목숨 줄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그 목숨 줄을 스스로 끊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예언자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하늘이 달라졌고 달라져 가는 것을 알고 있다.

벼 베는 기계가 논바닥을 돌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른 바랭이풀을 깔고 앉아 날씨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자꾸 ‘삐악삐악’ 하는 병아리 소리가 들려왔다. 논 위쪽 오리장에 함께 있는 닭이 알을 품는다더니 이제 깨어났구나 싶었다. 이 추위에 어떻게 키우려고 깠나?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 기계에서 내려온 정우한테 병아리 걱정을 했더니 뜻밖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 아침 논에 왔더니 어디서 병아리 소리가 자꾸 나요. 소리 따라 갔더니 도랑 바닥 풀 속에 병아리가 여러 마리 있는데, 우리 병아리가 아니라요. 그런데 저쪽 언덕 위에서도 병아리 소리가 나서 올라가 봤더니 바로 개 기르는 집에서 병아리를 상자로 사 놨어요. 물어보니 삶아서 개 먹잇감으로 주려고 사 왔다고 해요. 500마리씩 들어 있는 상자를 24상자 샀다니까 모두 1만2000마리지요. 그 병아리 상자를 차에서 내리고 옮기고 할 때 병아리들이 더러 튀어나오고 떨어지고 했겠지요. 그 중에서 벼랑으로 굴러 떨어진 것도 있어서 밤새도록 마른 풀 속에 들어가 죽지 않고 견딘 겁니다. 글쎄 아무리 돈벌이가 좋다지만 어디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막바로 그 개집 주인 젊은이한테 내 생각을 말했더니 대답이 이래요. ‘약한 짐승이 강한 짐승에 잡아먹히는 것은 당연하다고요’. 기가 막혀 더 말을 안 하고 왔어요.”

다음 날 벼를 거두는데 또 나가서 보다가 쉴 참에 기계에서 내려온 정우한테서 어제 그 병아리 뒷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아침 닭장에 갔더니 병아리 두 마리가 죽어 있고, 어미닭은 보이지 않았어요. 너구리가 물고 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논으로 가는데 도랑 바닥에 어미닭이 있었어요. 거기서 병아리를 여러 마리 품고 있잖아요. 하, 그놈이 참! 밤중에 닭장에서 제 새낄 품고 있는데, 어디서 자꾸 병아리 우는 소리가 나니까 그만 그 소리나는 데로 가서 도랑 바닥에 울고 있는 양계장 병아리들을 모두 품어 안고 밤을 새운 거지요. 그래서 정작 제 새끼는 영하로 내려간 추위에 얼어죽었어요. 할 수 없이 어미닭과 그 병아리들을 안고 와서 닭장에 넣어 뒀어요.”

▼생명 귀한 줄 모르니 어찌할까▼

나는 이 말을 듣고 사람보다 닭이나 개와 같은 짐승들이 얼마나 더 높고 아름다운 자리에 있는가를 새삼 생각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닭 둥우리에서 어미닭이 품고 있는 갓 깨어난 병아리를 꺼내어 두 손으로 안아 보고 그 보드랍고 귀여운 모습에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생명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그 병아리를 본 순간이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생명이 존엄하다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말만으로는 결코 안 된다. 다만 그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데 병아리를 수백 수천 마리씩 한꺼번에 가마솥에 넣어 끓이는 짓을 예사로 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물려주겠는가? 사람의 앞날이 무섭기만 하다.

▽이오덕은 누구?▽

평생 우리말 살리기에 힘을 쏟아왔으며 1999년 건강을 돌보기 위해 장남이 사는 충주 근처 무너미 마을로 옮겨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동시집 ‘개구리 울던 마을’, 평론집 ‘우리 글 바로 쓰기’ 등의 저서를 냈다. 최근 자연과 사람에 대한 수필집 ‘나무처럼 산처럼’을 펴냈다.

이오덕 아동문학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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